항목 ID | GC0340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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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耕 |
영어음역 | Gim Gyeong |
이칭/별칭 | 김만두(金萬斗)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하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의 서양화가.
[활동 사항]
본명은 김만두(金萬斗)인데, 해방 이후 어수선한 정국에서 자의반 타의반 김경(金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의 새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은 친구이자 시인인 장호(章湖)로, ‘밭을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그림 그리는 일에 매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김경은 1922년 4월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하평리에서 김진용(金辰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그의 종숙부 되는 김행용(金幸容)[독립지사, 진교면장 역임]의 후원으로 진교소학교를 졸업한 후 만 18세 되던 1940년 예술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대학 미술학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시절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을 전전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자신의 피를 팔아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의 유학 동기생들로는 조각가 문신을 비롯해 임규삼, 임직순, 김훈 등을 들 수 있다. 미술 재료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 그는 학교 화실에 남아 유화보다는 주로 데생에 몰두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데생력이 뛰어난 작가’란 평가를 받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 시절 그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감시를 받아 오다 한때 유치장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처럼 뚜렷한 민족의식이 형성된 데에는 독립지사였던 그의 종숙부 김행용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우리나라 학생들을 징집하는 것을 보고 이를 피하기 위해 1943년 귀국했다.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온 김경은 자신의 모교인 진교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삼천포가 고향인 박경희(朴慶姬)와 결혼했다. 당시 그는 학생들에게 조선의 역사를 비밀리에 가르쳐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제자였던 박광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는 ‘황소’를 소재로 한 향토적 풍경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진교소학교 재직 시절이 작품 창작에 있어 안정기였으며, 짙은 황토와 청록빛 소나무의 어우러짐, 한려수도의 잔잔한 바다, 금오산의 넉넉한 품 등, 자연을 소재로 하여 남도(南道) 특유의 따스한 토속적 정서를 캔버스에 옮길 수 있었다.
그 후 진주와 마산 등지를 떠돌다가 31세 때인 1953년 부산 초량국민학교와 부산중학교에서 미술 강사로 활동했으며, 서성찬·김영교·김윤민·김종식·임호 등과 함께 토벽동인회를 결성하고 작품 활동에 몰입하였다. 토벽동인회의 창립 전시회 때 그는 붉은 색조의 토속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20호 가량의 「양과 소년」 등의 작품을 출품했으며, 2회와 3회 토벽전에는 ‘소’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전시해 ‘굳센 조형성을 추구하는 작가’로 평가받았다.
1956년 7월 김경은 부산의 미화당백화점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했고, 이주홍이 신문에 연재한 『수호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1958년 3월 서울 인창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긴 그는 더욱 창작에 열중하였으며, 이때 이규상·정점식·문신·정규·유영국·박고석·한묵 등과 함께 모던아트동인전에 참여하였다. 추상 계열의 작가로서 당시 화단의 주목을 받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 역시 추상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하였으며, 「시점」·「침식」 등의 작품에서 보이듯 해체된 새로운 조형미 탐구가 그의 작품 세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1964년 뇌일혈로 쓰러진 김경은 나날이 건강이 악화되어 갔으나, 이 해에 ‘소’를 주제로 한 작품 30여 점으로 제2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러나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려 했으나 입원비를 마련할 수 없자 벗인 장호가 중심이 되어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에 박고석·정규·박항섭 등은 큰돈과 함께 작품까지 치료비로 써 달라며 보내 왔고, 박수근·천경자·문신·하인두 등의 미술인과 박경리·박재삼·오영수 등의 문인들도 정성어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주위 예술인들의 쾌유를 바라는 기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5년 7월 26일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50년 부산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국민 예술제 미전에 목판화 「어시장에서」를 출품해서 주목을 받았고, 경남미술가협회에서 주최한 제1회 미전에 「어군포착(魚群捕捉)」을 출품하며 지역의 주요 화가들과 만났다. 1953년 토벽동인전에 「소」, 「소녀와 닭」, 「풍경」, 「항아리와 소녀」, 「소와 사나이」, 「여인」 등을 출품했다.
1955년 하드보드지 위에 그린 「소」는 인간의 형상에 가깝다. 앞다리를 곧게 펴고 일어나려고 하는 소의 고통과 투혼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툼한 윤곽선과 굵은 붓자국들은 김경 특유의 투박한 색감과 질감을 더없이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같은 해에 찍은 목판화 「성난 소」는 상반신을 들고 돌진하는 소이다. 목판 특유의 선 맛과 더불어 삶의 역경에 처한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 무렵 그는 ‘여인’, ‘소’, ‘닭’ 등을 주로 그리고 있다. 머리를 숙이고 들이받는 포즈를 가진 1957년 작 「소」는 화면 전체를 휘감아 도는 굵은 붓질의 재질감으로 이중섭의 소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한 인상을 풍긴다.
1950년대 중반의 김경은 드로잉과 판화를 많이 남겼다. 김경의 드로잉과 판화는 유화를 예비하는 에스키스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의 예술적 자질과 노작의 흔적을 실감할 수 있는 본격적인 작품들이다. 머리에 바구니를 인 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행상」이나 작업실 전경을 그린 목판화들, 1954년 작 「가면」 등은 당대의 생활상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었던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확인하게 한다. 1957년 작 「소와 여인」이나 「여인과 명태」 같은 작품들은 1980년대를 이끈 오윤과 홍성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곡선과 직선, 윤곽선과 판면의 극적인 대비를 감지할 수 있어 한국 근대 화단을 견인한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해 준다.
김경 목판화의 힘은 드로잉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간결한 선으로 램프나 명태를 그린 습작들을 비롯해서 1957년 작 「명태C」에 이르러서는 그 간결하면서도 골기 넘치는 필치가 힘의 화가 김경을 실감하게 한다. 인체를 그린 그림들도 단순히 몸의 선을 그린 것이 아니라 동시대 삶의 지평을 담아내는 사람들을 그려 내고 있다. 드로잉을 통해서 한 화가의 천부적 자질과 노력하는 화가의 모습을 남긴 경우로, 흔치 않은 일이다.
1958년 박고석·이규상·천경자·정규 등과 함께 한 한국 최초의 현대 회화 그룹 모던아트협회전에 「조우」·「저립」·「침식」 연작 등을 출품했다. 이 무렵부터 김경은 작품 방향을 바꿔 추상의 경향을 보인다. 김환기의 반추상 작업을 연상시키는 1960년 작 「정립(停立)」은 수직과 수평의 선적인 요소를 원과 사각형의 색면과 결합한 추상 회화이다. 추상화가로서 당대를 견인할 만한 대표작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근대 회화의 도입과 정착기를 거친 예술가의 고뇌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 「동토[절필]」는 거친 마티에르를 가진 황토색의 색면 한구석에 검은 구멍 하나를 남기고 있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김경의 작품 속에는 독특한 형식과 의미가 담겨 있으며, 향토색 짙은 초기의 작품들과 추상에 바탕한 후기의 작품 모두에 그의 진지한 예술혼이 배어 있어 민족 미술 정립 및 참된 예술가로서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상훈과 추모]
1965년 이봉상의 주선으로 중앙공보관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는데, 이봉상은 그를 두고 “현대라는 미명 아래 위장된 예술 세계를 외면하고, 애끓는 창작 의욕과 준엄한 창작 정신을 파헤쳐 나간 작가이다.”라고 평하였다. 1982년 4월 서울 조선화랑에서 열린 대규모 유작 전시회에서도 구도적 삶과 치열한 예술 정신을 느끼게 해 많은 사람이 공명과 감동어린 찬사를 보냈다. 1986년 10월 화가 진의장과 도예가 최정간에 의해 하동군 진교면 하평리 입구에 김경화비(金耕畵碑)가 세워졌으며, ‘김경 미술상’도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