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069 |
---|---|
한자 | 養心齋拈心字-崔益鉉- |
영어의미역 | Writing a Rhyming Character Sim at Yangsimjae by Choe Ikhye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석기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33년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06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 |
성격 | 한시|서정시|칠언 절구 |
작가 | 최익현(崔益鉉)[1833~1906] |
[정의]
1902년경 면암 최익현이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에 있는 여씨의 재실 양심재에서 읊은 한시.
[개설]
「양심재염심자(養心齋拈心字)」는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문집 『면암집(勉庵集)』 권2에 수록되어 있다. 1989년 여강출판사에서 간행한 『면암최선생전서(勉菴崔先生全書)』 인책(人冊)의 문인 곽한소(郭漢紹)가 지은 「남유일기(南遊日記)」에 의하면, 최익현은 1902년(고종 39) 4월 9일 경상남도 하동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5월 11일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 있는 조성주(趙性宙)의 집에서 묵었다.
5월 13일에는 황토재를 넘어 하동군 횡천에 있는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857~915]의 영당에 배알하였다. 5월 16일에는 사림 100여 명이 모여 향음주례를 거행하였는데, 정재규(鄭載圭), 최숙민(崔琡民), 조성주 등 경상우도(慶尙右道) 노론계 노사학파 학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아마 이 시기에 여씨(余氏)가 사는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의 양심재(養心齋)에서 「양심재염심자」를 지은 듯하다.
최익현의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양평 벽계(蘗溪)의 이항로(李恒老)[1792~1868]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언관으로 재직할 때 강직성을 발휘하여 불의를 척결하였다.
1873년(고종 10)에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단행하자 시정을 건의한 상소이다. 「계유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신들의 반발로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뒤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정신으로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였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 척사 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 등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여러 편의 상소를 올려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을사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 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1858~1916]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 운동은 집단적이고 무력적인 항일 의병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6년(고종 43) 윤4월 전라북도의 태안에서 궐기하였다. 74살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마지막으로 진충보국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우국 애민 정신과 위정척사 사상은 한말의 항일 의병 운동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에 지도 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저술로 48권의 『면암집』이 있다.
[구성]
칠언 절구의 구성법에 맞추어 지은 한시이다. 시의 제목이 「양심재염심자」이기 때문에 심성을 수양하고 공부하는 건물의 이름에 맞게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내용]
금인심역고인심(今人心亦古人心)[요즘 사람 마음도 옛날 사람 마음 같아]
위애제군용력심(爲愛諸君用力深)[제군들을 사랑해서 힘을 기울임이 깊네]
해내도도무정지(海內滔滔無淨址)[온 세상 도도한 물결 청정한 곳 없으니]
요장여일탁지음(聊將餘日托知音)[남은 여생을 이곳 벗들에게 의지하리]
[특징]
제1구에 ‘심(心)’, 제2구에 ‘심(深)’, 제4구에 ‘음(音)’의 운자를 썼다.
[의의와 평가]
「양심재염심자」는 구한말의 유학자 최익현이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의 양심재에서 유교의 도가 없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심성을 갈고 닦으며 강학하는 이들을 보고 도를 부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노래한 시이다. 최익현은 만년에 도가 무너져 가는 세상을 목격하면서 도를 부지하고자 애를 쓰는 하동 지방 학자들을 통해 자신도 그런 삶을 잠시 꿈꾼 듯하다. 구한말 유학자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