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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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衿州 |
영어음역 | Geumju |
이칭/별칭 | 금주(黔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덕원 |
[정의]
고려시대 광명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개설]
고구려시대에는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고, 신라의 영토가 된 후 경덕왕(景德王)이 곡양현(穀壤縣)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 관할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금주(衿州)로 고쳤다. 금주는 달리 금주(黔州)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원래 금천강씨(衿川姜氏) 시조(始祖)인 강궁진(姜弓珍)의 근거지였다. 강궁진은 고려 전기에 이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임명되었다. 강궁진의 활약에 힘입어 성종(成宗) 때에는 시흥(始興)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1019년(현종 10) 요(遼)나라 소배압(蕭排押)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龜州大捷)의 주인공 강감찬(姜邯贊)이 강궁진의 아들이다.
[변천]
940년 금주로 개칭한 후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의 수주(樹州) 관할이 되었고, 1069년(문종 23) 이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이후에는 경기(京畿)에 속하였으며,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좌우로 나누었는데, 이때 금주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되어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의 지휘를 받았다. 1413년(태종 13) 금천현으로 개칭되었다.
[의의와 평가]
광명 지역은 고려 전기부터 수도인 개경(開京)의 인근 지역에 위치한 지리적인 특징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강궁진의 활약에 힘입어 성종 때 시흥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는데, 지금의 시흥이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노온사동 새터말과 [노온사동] 능말 지역은 금천강씨의 세거지(世居地)로서 한강 이남에서는 최대의 집성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