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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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統一新羅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노성태 |
[정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9주로 나누어 통치하던 시기.
[개설]
통일신라시대 전국을 9주로 나누었을 때 전라남도 일대는 무진주(武珍州)로 편제되었고, 치소는 지금의 광주광역시였다. 무진주는 무주(武州)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무주는 전라남도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무등산 일대의 무진고성이 있다.
[지방 제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확대된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지방 통치 조직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686년(신문왕 6)에는 5주였던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밑에 군과 현을 두었으며,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특별한 곳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일부 중앙 귀족과 옛 고구려·백제의 귀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9주는 대체로 옛 신라·고구려·백제의 영역에 각각 3개씩 설치하였다. 9주 가운데 옛 백제 영역에는 무진주·웅천주(熊川州)·전주(全州) 등 3개의 주를 설치하였으며, 5소경 중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을 두었다. 즉, 신문왕 6년 전국을 9주로 나눌 때 전라남도 일대는 무진주로 편제되었고, 치소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일대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면서 무진주가 무주(武州)로 바뀌었는데, 무주는 15군 43현을 관할하였다.
무주의 치소였던 지금의 광주광역시 일대는 근처 3현인 현웅현(玄雄縣)[현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용산현(龍山縣)[현 나주시 일부], 기양현(祈陽縣)[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을 직접 관할하는 전라남도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따라서 무주에는 중앙에서 장관과 부관이 파견되어 행정을 책임졌고, 군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이 파견되었다. 무열왕[재위 654~661] 대에는 주의 장관이 군주(軍主)에서 도독(都督)으로, 다시 신문왕[재위 681~692] 대에는 총관(摠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는 군사적 비중이 줄어들고 행정적 성격이 강해졌음을 보여 준다.
신라는 소경과 주·군·현 아래에 촌(村)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을 편제하여 관리하였다. 촌에는 지방의 토착 세력가를 촌주로 임명하여 중앙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으며, 지방 토착인 출신인 리(吏)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 아래에서 조세를 거두는 등 말단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중앙 정부는 촌주와 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외주(外州)의 리 한 사람을 상경시켜 왕경(王京)의 관부를 보좌하게 하는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마련하였다.
[군사 제도]
삼국 통일 후 신라의 군사 조직은 중앙의 9서당(誓幢)과 지방의 10정(停)으로 편제되었다. 지방의 주요 군사 조직인 10정은 정치·경제적 중심 도시인 주 치소의 인근에 배치되었다. 9주 중 하나로 전라남도 지역에 설치되었던 무진주에는 10정 가운데 하나인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 지금의 남평인 현웅현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주의 치소인 무진주에는 비금당(緋衿幢)이라는 군대가 편제되었는데, 비금당에는 8명의 당주(幢主)가 있었고 영당감(領幢監)과 영마병감(領馬兵監)이 각 8명씩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지방 토착인으로 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에 편성된 백성이 소속 군인으로 충원되었다.
[유적, 유물]
광주 지역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유적은 건물지나 석곽묘, 산성 등이다. 북구 누문동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금남로 도시철도 공사 구간에서는 우물지가 조사되었다. 북구 용두동에서는 석곽묘가 조사되었고, 석곽묘에서 인화문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광주읍성유허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읍성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 지역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무등산의 지맥인 장원봉 일대에 축조된 무진고성이다. 무진고성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축조되어 고려 초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의 건물지와 동문지에서는 막새기와, 순청자, 상감청자 등의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관련 기록]
문무왕 대에 무진주[현 광주광역시]의 리였던 안길(安吉)이 수도에서 상수한 예가 『삼국유사』 권2 기이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문무왕의 서제(庶弟)인 차득공(車得公)이 지방을 순찰하던 중 무진주에 들렀을 때 주리(州吏)인 안길의 집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지 한참 후 안길이 왕경[현 경주]에 가서 상수하게 되었을 때, 재상이 된 차득공을 다시 만났다. 이때 안길은 옛날의 일로 차득공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상수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도록 산과 전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