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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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珍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노성태 |
[정의]
백제와 통일신라 때 광주 지역을 부르던 옛 지명.
[개설]
광주광역시 최초의 지명인 무진주(武珍州)는 백제 동성왕[재위 479~501년]이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친히 치고자 무진주”에 이르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진주를 ‘노지(奴只)’라고도 불렀다는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의 기록도 있다. 무진주는 무주(武州)를 거쳐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지금 이름인 광주(光州)라 하였다. 광주광역시의 첫 지명인 무진주의 흔적은 ‘광주무진중학교’ 교명 등에 남아 있다.
[형성 및 변천]
통일신라시대인 686년(신문왕 6) 무진군이 무진주로 승격되면서 광주 지역은 처음으로 전라남도 지역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그 뒤 757년(경덕왕 16)에는 행정구역의 명칭이 중국식으로 고쳐지면서 무진주가 무주(武州)로 바뀌고, 무주에는 15군 43현이 소속되었다. 무주의 치소였던 광주 지역은 현웅현(玄雄縣)[현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용산현(龍山縣)[현 전라남도 나주시 일부], 기양현(祈陽縣)[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을 직접 관할하는 등 전라남도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한편, 무진주에는 지방군인 10정 가운데 하나인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 현웅현(玄雄縣)[현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일대]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주의 치소인 무진주에는 비금당(緋衿幢)이라는 군대가 편제되었는데, 비금당에는 8명의 당주(幢主)가 있었고 영당감(領幢監)과 영마병감(領馬兵監)이 각 8명씩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지방 토착인으로 여갑당(餘甲幢)과 법당(法幢)에 편성된 백성이 소속 군인으로 충원되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 제26, 「백제본기」 제4, 동성왕조에는 “8월에 왕이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친히 치고자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그만 중지하였다[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乃止].”라고 기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에는 “백제 무진주, 혹은 노지라고도 한다[百濟 武珍州 一云奴只].”라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