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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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百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후백제 |
집필자 | 노성태 |
[정의]
고대 남북국시대에 견훤이 완산주에 세운 왕조 국가.
[견훤의 무진주 점령]
신라 말의 호족 가운데 사벌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의 원종과 애노, 죽주[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기훤, 북원[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양길, 완산[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의 견훤, 철원의 궁예 등이 당시 두드러진 지방 세력가이었다. 이 중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 견훤과 궁예(弓裔)[?~918]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견훤 열전에 의하면, 견훤은 상주 가은현 출신이었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상주를 대표하는 호족이었다.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 중앙군에 편입된 견훤은 전라남도 일원의 방수군(防戍軍)의 비장(裨將)이 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후 진성여왕 때에 농민 반란의 확산을 계기로 신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초기 거병 당시 견훤의 군사적 기반은 신라 정규군 출신이 핵심을 이루었고, 여기에 서남해안 일대의 해상 세력이 포함되었다.
견훤의 거병 이후 하나의 획을 그었던 사건이 892년(진성왕 6) 무진주의 점령이었다. 무진주를 장악한 견훤은 전라도 광주 지역 호족들과 결합하였다. 이를 알 수 있는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기(古記)에 전하는 설화에는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의 북촌에 살았는데 딸의 용모가 단정하였다. 그 딸이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매일 자색(紫色)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침실에 와서 저와 교혼(交婚)하곤 합니다.'라고 하자, 아버지는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두어라.' 하여 그 말대로 하였다. 날이 밝아 실이 간 곳을 찾아가니 바늘이 북쪽 담장 아래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그 후 임신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렁이 설화는 견훤의 부모와 관련된 것이지만, 견훤 자신의 혼인 설화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견훤도 무진주에 들어와 광주 지역 토호의 딸과 혼인을 통해 세력을 키워 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견훤과 광주와의 연관성]
견훤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를 근거로 경상북도 상주 가은현 출신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라도 광주 북촌 설화를 근거로 광주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변동명 교수는 「견훤의 출신지 재론」이라는 논문에서 견훤이 상주 출신이 아닌 광주 출신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견훤의 출신지가 상주인지 광주인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광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지렁이 설화뿐 아니라 견훤과 관련된 ‘견훤대’와 ‘방목평’이라는 흔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 광주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 건국의 토대이었다. 견훤은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5,000 명이 넘는 세력을 규합한 뒤 무진주를 떠나 완산주[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이 초기 세력 근거지였던 광주를 떠나 전주로 이동한 것은 광주의 배후 도시인 나주 공략에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나주 호족이 견훤의 경쟁자인 왕건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열전 제10 견훤에는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본래 성은 이(李)인데 후에 견(甄)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이니 농사로 생활하다가 후에 장군이 되었다. …… 종군하여 수도[경주]에 들어왔다가 서남해 방수(防戍)에 부임하여 창을 베고 대적하였으며 그 용기가 늘 다른 병사에 앞섰기 때문에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甄萱,尚州加恩縣人也.夲姓李,後以甄為氏.父阿慈介,以農自活,後起家爲将軍.…… 從軍入王京,赴西南海防戍,枕戈待敵,其勇氣恒爲士卒先.以勞爲裨将.]”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기이 제2 후백제 견훤에는 “견훤은 경복(景福) 원년(892)에 왕을 칭하고 완산군에 도읍을 세워 43년을 다스리다가 청태(淸泰) 원년(934)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하여 고려의 태조에게 투항하였다.[至景福元年壬子,稱王立都扵完山郡.理四十三年以清泰元年甲午,萱之三子簒逆,萱投太祖.]”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