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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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重繪 |
영어공식명칭 | Park Joonghoi |
이칭/별칭 | 수여(受汝),소은(素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다성 |
출생 시기/일시 | 1664년 - 박중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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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91년 - 박중회 사망 |
묘소|단소 | 정광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룡동 |
성격 | 문인·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순천(順天) |
[정의]
조선 후기 광주에서 활동한 문인·학자.
[가계]
박중회(朴重繪)[1664~1691]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수여(受汝), 호는 소은(素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박창우(朴昌禹)이며, 할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이다. 아버지는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이며, 부인은 정필진(鄭必晉)의 딸 영일정씨(迎日鄭氏)이다.
[활동 사항]
박중회는 1664년(현종 5)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송시열과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 사이에 회니시비(懷尼是非)[조선 후기 숙종 때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비방하였던 사건이며,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한 계기가 된 사건]가 일어났을 때, 박중회는 「공자설(公字說)」을 지어 중립을 지켰던 박세채(朴世采)[1631~1695]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또한, 박중회는 후로(後老) 박송령(朴松齡)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을 정도로 각별하였는데 박송령이 먼저 사망하자 자신이 죽으면 쓰려고 준비해 둔 심의(深衣)을 박송령에게 주었다고 한다.
1689년(숙종 15)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로 귀양갈 때 안여해(安汝諧)[1657~1691] 등과 함께 배송(陪送)하였는데 당시 송시열은 시에 "어지러운 말로(末路)에 참된 도가 없는데 오직 민옹(閔翁)만이 성신(聖神)을 계승하였네. 물고기 뛰놀고 솔개 날아 찬란히 발명하는 곳에 천재(千載)에 다시 사람이 없다 말하지 말게."라고 하였다. 박중회는 1691년 겨울에 마마[痘疹]에 걸려 사망하였는데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은 임영(林泳)에게 보낸 글에서 "광주의 박모가 힘써 배워 얻음이 있었고 문예가 함께 나아가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들 칭찬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다."라고 박중회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학문과 저술]
박중회의 저서로 『소은집(素隱集)』이 전해지며, 양득중(梁得中)의 『덕촌집(德村集)』에 박중회의 만시(挽詩)가 실려 있다.
[묘소]
박중회는 1691년(숙종 17) 전라도 광주의 정광산(淨光山)[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룡동]에 장사 지냈다.
[상훈과 추모]
박중회는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등과 함께 진천사(眞泉祠)에 배향되었다. 진천사는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현재는 진천사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