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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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沔川卜氏 |
영어공식명칭 | Myeoncheon boksi|Myeoncheon bo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남석 |
본관 | 면천복씨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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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세장지 | 면천복씨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 677-3 |
성씨 시조 | 복지겸(卜智謙)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에 관향을 둔 세거 성씨.
[개설]
면천복씨(沔川卜氏)는 당진시 면천에 본관을 둔 세거 성씨로, 시조는 복지겸(卜智謙)[?~?]이다. 복지겸은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배현경(裵玄慶)과 더불어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한 인물이다.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는 복지겸이 말년에 딸과 함께 낙향하여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고, 복지겸의 딸이 병든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빚었다고 전해지는 두견주(杜鵑酒)가 지금도 주조되고 있다. 또한 순성면 양유리에는 복지겸을 제향하는 사당인 무공사(武恭祠)가 있다.
[연원]
면천복씨의 시조 복지겸의 선계(先系)는 중국 당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오계(五季)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 면천으로 건너와서 서해에 출몰하던 왜구를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다고 전한다. 이들이 도착한 곳이라는 의미로 면천을 관향으로 삼았는데, 복지겸의 선계 이름을 알 수 없어 복지겸을 시조로 하여 계통을 잡고 있다.
복지겸은 태봉을 건국한 궁예(弓裔)의 마군 장군(馬軍將軍)이었다. 궁예가 포악무도(暴惡無道)하여 민심을 잃자, 918년(태조 1)에 홍유·신숭겸·배현경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 결과 개국 일등 공신에 봉해졌고, ‘사귀(沙貴)’라는 처음의 이름도 ‘지겸(智謙)’으로 고쳤다.
복지겸은 그 후 마군 장군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사건을 사전에 탐지해 태조에게 알려 진압하게 하였고, 순군리(巡軍吏) 임춘길(林春吉)이 청주에서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알고 태조로 하여금 모두 평정시켰다. 이와 같이 복지겸은 고려 초기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 시대 면천복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무과에 올라 연안 부사(延安府使)를 지낸 복규(卜奎)다. 몽골의 간섭기였던 1290년(충렬왕 16), 거란족인 합단(哈丹)이 몽골에 쫓겨 두만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한 바 있었다. 이때 혜성군[면천군] 출신인 복규가 1291년(충렬왕 17) 원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다가 원주에 침입한 합단병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조정은 복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복규의 출신지였던 혜성군에 현령(縣令)을 파견하고 주현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다시 고을의 격을 향상시켜 면주(沔州)로 만들고 지면주사(知沔州事)를 파견하였다.
복규는 합단을 물리친 공적으로 1292년(충렬왕 18) 지서경 유수(知西京留守)가 되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1308년 전날의 전공에 대한 보답으로 원주 지역민의 잡공(雜貢)과 요역(徭役)을 3년 동안 면제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복규의 생몰 연대와 묘소는 알 수 없다.
복규의 아우인 복수지(卜守之)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면천복씨 대동보』에 의하면 복수지의 자는 보경(保卿), 시호는 충광(忠匡)이며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아버지 복윤상(卜允尙)은 충렬왕 때 도령정 부상서 병부 판서(都令正部尙書兵部判書)를 지냈으며,. 복수지의 묘는 현재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 677-4번지의 면천복씨 선산에 있다.
조선 시대 면천복씨의 인물로는 복한(卜僩)이 유명하다. 복한의 자는 의숙(毅叔), 호는 구암(久菴)이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복한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있을 때, 단종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다. 복한의 아들 복오(卜吾)는 1444년에 생원이 되었고, 임천 군수·서천 군수·충청 도사를 역임하였다. 복오의 아들 복승원(卜承元)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남원 부사에 이르렀다. 복승원의 동생인 복승형(卜承亨)도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 목사·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입향 경위]
면천복씨는 당진시 면천면이 본관이지만, 정작 후손들은 이곳에 많이 거주하지 않고 있다. 현재 대표적인 세거지로는 충청남도 청양군·홍성군, 전라북도 남원군, 경상남도 울산시 등이 있다.
[관련 유적]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와 순성면 양유리에는 면천복씨와 관련한 유적이 남아있는데, 바로 ‘은행나무’와 ‘안샘’이다. 전설에 의하면, 복지겸이 병에 걸려 면천에서 휴양할 때 백약이 무효하자 복지겸의 딸이 아미산에 올라 백일기도를 올렸다. 마지막 날에 신선이 나타나 안샘의 물을 길어 두견주(杜鵑酒)를 빚고 정성을 다하여 은행나무를 심으라고 하였고, 그대로 하였더니 복지겸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은행나무는 면천면 성상리 옛 면천 초등학교 교정에 있고, 그 아래인 면천면 성상리 1117번지에 안샘이 있다. 또한 복지겸을 제향하는 사당인 무공사(武恭祠)는 당진시 순성면 순성로 73[양유리 677-3]에 있다.
한편, 당진시에서는 복지겸의 생가 터와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위치는 당진시 순성면 성북리 435번지와 727-3번지 일대이다. 이른바 ‘윗잣디’ 마을로,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향토사가들에 의해 제기된 주장의 근거는 이곳에서 건물의 주춧돌로 짐작되는 돌과 기왓장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점, 꽃병 모양의 도자기가 출토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복지겸 장군의 생가 터’라는 전설이 수백 년간 구전되어 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를 확증할 만한 근거는 아직 찾지 못하였고 논란만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