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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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祈雨祭[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a ritual praying for rain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경호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 지역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하늘에 빌었던 제사.
[개설]
기우제(祈雨祭)는 가뭄이 계속되어 농작물의 파종이나 성장에 해가 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의(祭儀)이다. 비에 의존하는 농업의 특성상 가뭄은 농경 사회에서 가장 큰 재앙이었다. 따라서 기우제는 조정으로부터 촌락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지내는 가장 큰 행사였다. 삼국 시대에는 명산대천이나 시조 묘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고려 시대에는 불교식 법회인 태일이나 도교식의 초제(醮祭), 그리고 무당을 모아서 지내는 취무도우(聚巫禱雨)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강우를 빌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식 기우제를 중심으로 각종 주술적 방법까지 동원된 기우 풍습이 있었다.
[변천]
달성 지역은 예전에 농사를 생업으로 하였기 때문에 각 마을에서 따로 기우제를 올렸지만, 고을 단위인 현과 읍·면이 주관하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는 날이 가물면 좁은 지역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넓은 들이 모두 피해를 받으며, 그 들을 여러 마을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유가읍과 현풍읍에서는 한재(旱災)가 들면 인근에서 가장 큰 유가사에 있는 괘불을 현풍천에 모셔 놓고 유가사의 큰스님을 앞세워 기우제를 올렸다. 이때 면장을 비롯하여 각 기관장들이 모두 참석하는데, 스님의 염불 소리를 따라 며칠간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 지냈다. 또는 달성 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 달불을 놓고 간단한 제수를 올려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대견사지 기우제]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용리에 있는 비슬산 대견사지(大見寺址)는 달성군에서 기우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1988년 큰 가뭄이 있어서 기우제를 지낸 사례를 중심으로 대견사지 기우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기우제를 지내기 3일 전부터 현풍읍 소재지 각 가정은 3일간 대문에 황토로 금토를 하고 버드나무 가지와 솔잎 가지를 대문에 걸었다. 주민 모두는 3일간 금주하였다. 황토는 부정이 들어오지 못하게 가정을 정화하는 것이고, 버드나무 가지와 솔잎 가지는 빗줄기를 형상화한 유감 주술적 행위이다. 기우제는 밤에 지낸다. 제관 3인을 선정하고, 생 돼지와 제물을 대견사지에 차려 놓고 달불을 밝힌 다음 기우제를 올린다. 대견사지에서 기우제를 지낸 뒤 다음날에는 대니산 정상에서, 3일째는 충혼탑이 있는 사직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당시 하늘이 감동하여 3일째 새벽에 단비가 내렸다고 한다.
[유가읍 용봉 1리의 기우제]
낙동강 물이 관개 시설을 이용하여 마을로 올라오기 전, 달성군 유가읍 용봉 1리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마을의 뒷산인 용산 골짜기에 있는 용박골의 용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곳은 용연 폭포 아래에 있는 소(沼)로서, 이 소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가다가 비늘이 떨어졌는데, 이 비늘을 이곳에 묻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용소의 넓이는 2m, 길이는 15m 정도이며, 깊이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용소의 깊이를 알아보려고 명주실에다 돌을 달아 용소에 넣었으나 명주실 두 꾸러미가 들어가도 계속 실이 들어가므로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었으며, 용소와 이어지는 용소보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기우제는 남녀 구분 없이 참여하며, 달불을 놓듯이 불을 놓는다. 기우제를 지낸 후에 여자들은 산에 올라가 치마에 돌을 싸거나 돌을 굴려 용소에 던져 넣고는 속옷을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유가읍 쌍계 1리의 기우제]
달성군 유가읍 쌍계 1리에서는 가뭄이 들 때 마을 앞 도랑에서 남녀 모두 불을 지피고 기우제를 올렸다. 가뭄이 심할 때는 남녀 구분 없이 3일간 목욕재계하고 속칭 '성만댕이'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달불처럼 불을 놓고 미리 준비해 간 제수로 기우제를 지냈다. 1982년 현풍 양수장 건설 이후 기우제는 지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