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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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嘉昌面 友鹿一里 賜姓 金海金氏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영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는 사성 김해 김씨 집성촌.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1리의 큰마실은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 집성촌이다. 우록1리의 중심이 되는 자연 촌락인 큰마실은 귀화 일본인의 후예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1602년(선조 35)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로 참전한 일본 이름 사야가(沙也可)가 귀화한 뒤 이곳에 정착하여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지금도 약 40가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이 마을의 입향조 사야가는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본관은 김해이다.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다. 김충선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였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그 뒤 동래·울산·진주 등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무찔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으로 선조(宣祖)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았다.
김충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10여 년간 북쪽 변경의 방어를 맡았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괄의 부장 서아지를 잡아 죽이는 등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주 쌍령에서 청군 500여 명을 죽인 전과를 올려, 임진왜란 때의 공에 더하여 임갑병(壬甲丙) 삼란의 공신으로 일컬어진다. 청과 화의가 성립된 뒤에는 대구로 내려가 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 『향약』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모하당집(慕夏堂集)』이 있다.
[현황]
마을에는 김충선과 현조(顯祖)들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녹동 서원과 김충선 유적비, 삼감재, 청검재 등의 기념비적 건물이 전승되고 있다. 녹동 서원은 김충선의 위패를 봉안하여 춘추로 재향하는 곳이다. 녹동 서원은 충절보국의 삶을 산 김충선 장군의 위업을 기려 영조(英祖) 말년부터 유림들이 한 뜻으로 건의하였고 1789년(정조 13)에 다시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의한 결과 1794년(정조 18)에 준공하였다. 그 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 중건되었다. 1972년 국고 지원을 받아 지금의 위치로 이건 복원하였다. 녹동 서원 외에도 마을에는 김해김씨들의 묘재인 삼감재(三柑齋)와 김해인 판관 김용하(金龍河)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청검재(淸儉齋)가 있다. 청검재에는 사당 자양사가 있어 봄가을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