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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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洞輔[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Choi Dong Bo |
이칭/별칭 | 자익,우락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60년 - 최동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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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588년 - 최동보 불굴사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588년 - 최동보 이덕홍, 장현광, 김우옹, 권춘란, 조호익, 최인 등과 벽골사에서 동고록을 맺음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4월 - 최동보 최인, 최계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왜구를 막아냄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7월 - 최동보 팔공산에서 공산 관군장으로 활동함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9월 - 최동보 팔공산에서 의병장들과 회맹함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7월 - 최동보 창녕 화왕산성에서 왜적과 싸움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8월 - 최동보 달성에서 왜적과 싸움 |
활동 시기/일시 | 1599년 - 최동보 영천 창수로 이거함 |
몰년 시기/일시 | 1625년 - 최동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12년 5월 25일 - 최동보 호조 참판에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828년 - 최동보 삼충사에 제향됨 |
추모 시기/일시 | 1832년 - 최동보 봉산사에 제향됨 |
출생지 | 최동보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
거주|이주지 | 최동보 거주지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
거주|이주지 | 최동보 이주지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
활동지 | 팔공산 - 대구광역시 동구 |
활동지 | 화왕산성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
활동지 | 최동보 활동지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 |
활동지 | 최동보 활동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증 호조 참판 |
[정의]
임진왜란 당시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익(子翼), 호는 우락재(憂樂齋). 6대조 할아버지는 지현(知縣) 최맹연(崔孟淵)으로 대구에 처음 거주한 입향조이다. 5대조 할아버지 최한(崔澣)은 참군(參軍)을 지냈으며, 고조할아버지 최자하(崔自河)는 감역(監役)을 지냈다. 증조할아버지 최해(崔海)는 만호(萬戶)를 지냈고, 할아버지 최종옥(崔宗沃)은 감찰(監察)이었다. 할머니는 영양 최씨(英陽崔氏)로 효행으로 천거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증직된 신와(愼窩) 최겸(崔謙)을 낳았다. 최겸이 최동보의 아버지가 된다. 영양 최씨가 사망한 후 충순위(忠順衛) 하희수(河希壽)의 딸 진주 하씨(晉州河氏)와 최종옥이 혼인하여 최인(崔認)과 최계(崔誡)를 낳았다. 막내 숙부인 최계의 둘째 아들인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은 대군 사부를 지냈으며, 최동집의 손자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다. 최동보의 어머니는 소암(小庵) 노수(盧遂)의 딸인 광산 노씨(光山盧氏)이다.
[활동 사항]
최동보(崔洞輔)[1560~1625]는 1588년 중부(仲父)[둘째아버지] 최인과 함께 불굴사에서 수학하며, 조호익, 장현광 등과 교유하였다. 1591년 5월 15일 대송정(大松亭) 향회에 최인, 최계와 함께 참석하여 여러 사람들과 나라를 걱정하며 만일의 사태를 논의하였다. 1592년 2월에 오강(烏江)의 금정(琴亭)에서 최인, 서진화, 장몽기(張夢紀), 권응수, 최계, 신해, 권응추, 손진, 백상엄, 최대기, 김인복, 박수영 등과 전란 발생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1592년 4월에 최인, 최계 등과 의병을 모집하고 팔공산과 금호강에서 적을 막았다. 반야(班野)와 삼구(三衢)에서 적을 만나 힘써 싸웠고, 경산 임당까지 추격하여 총검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에 초유사 김성일에 의해 공산 관군장(公山管軍將)에 제수되었다. 이후 경주에 주둔한 왜적의 북상 소식을 듣고 나현(羅峴)으로 군사를 옮겨 모량천(毛良川)에서 화공하여 당현(唐峴)까지 추격하여 300여 명을 베었다. 1593년 당교(唐橋)에서 관군과 의병이 합세하여 싸울 때도 참전하였고, 이어서 영천에서 권응수와 더불어 창암(蒼巖)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무찔렀다. 1594년 팔공산에 주둔하고 있을 때 김응하가 최동보 군진의 정연함에 크게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왜적의 재침으로 1596년 9월 22일에 팔공산에 주둔한 이눌(李訥)과 여러 의병장과 합류하여 진을 쳤고, 의병장들과 9월 28일에 「팔공산 회맹록」을 작성하였다. 「화왕산 동고록」에 의하면 1597년 7월 9일에 방어사 곽재우가 주둔하고 있는 창녕 화왕산성으로 나아가 왜적과 맞서 싸웠다[]. 8월 29일에 왜구가 팔조령에 집결한다는 관문을 받고 여러 의병장들과 달성(達城)에 집결하여 수차례 왜적과 싸웠다. 1598년 김응서가 달성에서 적을 격파할 때와 명나라 장수가 무진(武津)에서 승전할 때도 크게 활약하였다. 왜란이 끝난 후 전공 포상이 있을 때 최동보는 누락되어 군자감 봉사에 제수되었다. 1599년에 영천의 창수(蒼手)[현재의 금호]로 이주하여 은거하면서 강가의 정자 이름을 우락재로 고치고, 이를 호로 삼았다.
[저술 및 작품]
외조부인 진사(進士) 소암(小庵) 노수(盧遂)에게 글을 배웠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하고 특히 『대학』과 『주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1596년 9월 28일 팔공산에서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공산 회맹시」를 차운한 시를 지었다. 1857년 후손 최상순(崔尙峋)이 편찬한『우락재 최선생 시집(憂樂齋崔先生詩集)』이 있다. 이후 후손 최두술(崔斗述)이 실록 등을 증보하여 『우락재 최선생 실기』[7권 1책]를 간행하였다. 유고본으로 『우락재 유적(憂樂齋遺蹟)』이 있다. 이 유고본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해동 신협 일기(海東神篋日記)』가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1812년 임진왜란 당시 전공이 인정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증직되었다. 1828년에 대구의 삼충사[평천사]에 제향되었다. 1832년에는 경주시 외동읍 입실의 본당 마을에 있는 봉산사(鳳山祠)에 아들 최여호(崔汝琥)와 함께 제향되었다. 이 마을은 병족당 최여호의 아들 최경업(崔慶嶪)[1584~1674]이 만년에 영천 창수에서 이거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