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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왕선고개 너머 얻은 새 삶과 후삼국 통일의 계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32
한자 王建, 王先- 後三國 統一- 契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류영철

[정의]

927년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과 관련한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왕선고개의 의미.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왕선고개는 고려태조 왕건(王建)[877~943]의 후삼국 통일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왕건이 927년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패하여 도주하다가 왕선고개에 이르러 살았음을 확인하고 재기의 결의를 다졌고, 이것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927년 견훤(甄萱)[867~936]의 후백제(後百濟)가 신라의 도성을 침공하자, 왕건이 신라를 구하기 위해 5천의 정예병을 끌고 경주(慶州)로 향하였다. 왕건의 고려군은 경주에 이르지 못하고 후백제군과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였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한 왕건은 많은 속전(俗傳)을 후대의 역사 속에 남긴 채 도주를 거듭하게 된다. 그 도주로의 과정에 왕선고개가 있다. 왕건은 왕선고개를 지나 성주 땅을 밟음으로써 비로소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비록 신숭겸(申崇謙)[?∼927], 김락(金樂)[?∼927] 등의 장수를 비롯해 많은 병력을 잃었음에도 9년 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근저에는 왕선고개에서 스스로를 우뚝 세웠던 왕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견훤은 왜 경주를 침공했을까?]

궁예(弓裔)[?~918]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건국 초기에 '혜화지의(惠和之意)'를 표방하며, 주변 세력들과 화친하였다. 후백제도 그 대상이었으며, 두 나라는 일정 기간 원만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924년과 925년의 두 차례에 걸친 조물군 전투(曹物郡戰鬪)에서 알 수 있듯이 후백제의 군사적 공세는 결국 고려의 외교 노선에 변화를 야기하였다. 즉, 끊임없이 후백제와 화의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던 고려는 927년 정월, 용주(龍州)[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지역] 공격을 계기로 후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된다. 이는 곧 고려의 후백제에 대한 정책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는 정책 변화에 따른 공세를 취한 후, 정월의 용주 공격부터 8월의 강주 순행에 이르기까지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미 경상도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할 정도로 놀라운 군사력을 과시하였으며, 급격히 수세에 몰리게 된 후백제는 이러한 현실 타개를 위한 방책으로서 경주 침공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927년 9월에 있었던 후백제군의 군사적 행동은 먼저 근품성(近品城)[지금의 경상북도 상주군 지역]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불사르고, 곧이어 고울부(高鬱府)[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지역]와 경주를 함락시키고자 하였다. 근품성을 공격한 후, 경주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관문이자 마지막 보루인 고울부를 곧바로 습격하였다. 925년 10월에 고울부 장군인 능문(能文)이 고려에 투항하였을 때, 신라 수도에 가깝다는 이유로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돌려보낸 예처럼 이 지역은 신라의 흥망과 직결되는 곳이었다. 후백제가 이전에 경상도 지역에서 잦은 군사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이 지역에 대한 침공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신라 지역민의 민심이 이반되는 것과 고려를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함락시켰다는 것은 경상도 지역에서의 세력 열세로 인한 후백제의 위기감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왕건, 대구로 치달리다]

고려는 후백제의 군사적 행동과 신라의 구원 요청에 대해 1만의 병력을 파견하는 등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을 하였으나, 이 병력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경주는 함락이 되었다. 신라의 수도가 후백제에 의해 유린되고, 또한 왕마저 살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해 가고 있던 고려의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왕건이 직접 5천의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경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게 되었다.

대구의 공산(公山) 지역까지 온 왕건의 고려군은 영천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처럼 왕건의 구원병이 경주 지역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팔공산 권역에서 멈추게 된 것은, 견훤의 후백제군이 곧 대응하여 병력을 이끌고 온 때문이었다. 공산 지역에서 벌어졌던 고려군과 후백제군 사이의 전투 과정에 대해서는 역사 자료에 구체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팔공산 일원을 중심으로 한 대구의 각 지역에는 이 공산전투와 관련하여 비롯된 지명이나 설화 또는 속전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고려군의 진행로는 대체로 팔공산의 서쪽 방면에서 동쪽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서변동 지역에는 '무태(無怠)'라는 지명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지명의 유래는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왕건이 무태를 지날 때 이 지역 주민들의 부지런함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승되고 있다. 두 설의 진위를 살필 수는 없으나 무태라는 지명이 왕건과 관련하고 있음은 사실이라 하겠다. 이 무태 지역에서 동화천(桐華川)을 따라 북동쪽으로 진행하다 보면 '연경(硏經)'이라는 마을을 지나게 된다. 이 지명 또한 왕건이 이 지역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와서 '연경'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팔공산의 동화사 아래를 통과한 왕건의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능성 고개를 넘어 계속 영천 방면으로 진행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천군 고적조에 태조지(太祖旨)를 설명하면서, "고을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고려태조가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여 공산 밑 한 조그만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 근거가 된다. 비록 속전이긴 하지만 고려와 후백제가 영천에서 전투를 벌였던 흔적이자 단서이다.

[피로 물든 팔공산]

고려군이 후백제군과의 태조지 인근의 첫 접전에서 패배한 후, 후퇴하여 군사를 재정비한 곳은 현재 서변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살내[箭灘]'로서, 이 하천을 경계로 양군이 대치하게 되었다. 이 살내라는 명칭도 양군이 하천의 양쪽에 서로 대치하여 싸울 때, 서로 쏜 화살이 강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하고 있다. 살내에서 일시 원기를 회복하여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밀어붙이면서 진출한 곳이 미리사(美利寺) 앞이었다. 현재 미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은 파군재[破軍峙: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에서 동화사로 올라가는 길과 파계사로 올라가는 길 사이에 위치한 지묘동의 왕산(王山) 아래 산기슭으로서,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곳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긴 비각과 표충단(表忠壇)[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이 자리해 있다. 이 미리사 앞에서의 전투는 양국이 전력을 다한 공산전투 과정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으며, 바로 그 아래 자락인 파군재라는 곳에서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났다. 패배의 원인에 대해서는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시킨 사기와 경주 지역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확보한 군량이 풍부했던 반면에, 고려군은 5천의 정병이 개경으로부터 팔공산 지역까지 급히 달려오느라 군사들이 피로에 지쳤으며, 또한 확보된 군량조차 후백제에 비해 열세였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왕건의 참패, 도주]

참패를 한 왕건은 그 병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으로 자료는 전하고 있으며,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즉, 전하는 바로는 신숭겸이 후백제군의 눈에 잘 드러나는 왕건의 전복(戰服)을 자신의 전복과 바꾸어 입고 후백제군을 자신에게로 유인함으로써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지역의 명칭이 지묘동(智妙洞)으로 전해지게 된 원인도 왕건을 구한 그 지혜가 교묘하였다는 데서 연유한다.

겨우 몸을 돌보게 된 왕건은 파군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동화천을 따라 동쪽으로 도주하게 된다. 현재 지묘동의 동남쪽에 위치한 봉무동(鳳舞洞)에는 토성(土城)의 산기슭에 왕건이 도주하다가 앉아서 쉬었다는 속전이 전해지는 '독좌암(獨座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그 남쪽인 불로동(不老洞)에서 불로천을 따라 도동(道洞)과 평광동(坪廣洞) 쪽으로 진행되는 곳에는 아직도 왕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동촌 비행장 서쪽에 위치한 도동은 원래 장산군(獐山郡)[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영현(領縣)인 해안현(解顔縣)의 읍치(邑治)가 위치해 있었던 곳인데, 속전에 의하면 왕건이 해안교가 있는 부근의 들판을 지날 때 혹 후백제군이 나타날까 걱정하였으나 무사하게 되자 마음이 놓여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고 하여 이곳을 해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치성화현(雉省火縣)이었던 이곳을 해안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신라경덕왕 때라고 밝히고 있어, 이곳의 지명과 관련한 속전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으며, 단지 왕건과의 관련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도동을 거쳐 역시 동화천 변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평광동에 이른다. 이 평광동의 동쪽 끝은 동화천이 발원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야산에 의해 길이 가로막히게 된다. 산 아래 마을은 속칭 '시량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원래 '실왕리(失王里)'였던 마을 이름이 점차 음(音)이 변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실왕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속전에서는 왕건이 도주 중 평광동의 뒷산으로 숨었는데, 이곳에서 쉬면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랬으며, 후에 나무꾼이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이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왕을 잃은 곳'이라 하여 이곳을 '실왕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영모재(影慕齋)와 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모셨던 대비사(大悲寺)가 있었던 곳이라는 내용을 담은 비각이 보존되고 있다.

동화천 변을 따라 평광동의 시량이 마을까지 이르렀던 왕건은 이곳에서 길이 막히자 산을 넘어 현재의 안심(安心) 지역인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梅余洞)으로 도주하였다. 안심 지역은 속칭 '반야월(半夜月)'이라 불리는데, 이 지명은 왕건이 이 지역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 도주로를 비춰주었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 '안심'이라는 지명 또한 왕건이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안심하게 되었다고 전하는 속전에 근거하고 있다.

안심 지역에서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모동(顧母洞) 방면을 지나 황금동을 거쳐 앞산 지경에 이르면 왕건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속전들이 주로 사찰을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앞산의 아래 봉우리인 비파산(琵琶山)의 동쪽 자락에는 은적사(隱跡寺)가 위치하여 있다. '은적(隱跡)'이라는 용어에서도 느껴지듯이 왕건이 이곳에 은신하여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은적사라고 불리는 이 사찰은 936년(고려 태조 18)에 영조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앞산 순환로를 따라 서쪽 방면으로 진행하면 역시 비파산의 서북쪽 자락에 안일사(安逸寺)라는 사찰이 있다. 이 안일사의 창건 유래 또한 왕건이 이곳에서 편안히 쉬어 간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고 있어 왕건의 자취를 느껴 볼 수 있다. 또한 앞산의 아래 자락에는 속칭 '안지랑골'이 있다. 이곳에는 왕건이 이곳에 이르러 물을 마셨다는 왕정(王井)이 남아 있는데, 이 물을 장군수(將軍水)라고 부르고 있다.

은적사에서 안일사 그리고 안지랑골로 이어지는 서쪽 방면으로 앞산 순환 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면 대덕산의 서쪽 자락으로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임휴사(臨休寺)라는 사찰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사찰의 창건 유래 또한 왕건이 이곳에 임하여 쉬어 간 데서 연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속전의 내용이 중심이 되었지만, 이렇게 왕건의 도주로를 상정해 볼 때, 왕건은 대체로 팔공산 자락에서 동화천 변을 따라 해안현 지역을 거쳤으며, 현재의 안심 지역을 경유한 후, 대구의 앞산 지역에 이르러서는 달성군으로 진행하였던 것이다.

[달성의 왕선고개, 아! 살다]

앞산 자락에서 유천(流川)과 성서(城西)를 거쳐 왕건이 다다른 곳은 달성군 다사(多斯) 지역이다. 다사읍매곡리는 매실 마을이라 불리는 1리와 왕선 마을이라 불리는 2리가 있으며, 이 두 마을의 경계 구실을 하는 것이 왕선고개이다. 왕선고개는 지금의 왕선 주유소 앞 삼거리에서부터 매곡 네거리까지를 크게 우회하는 샛길을 말한다. 지금은 샛길이 되었지만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이 간선 도로였고, 지금의 강창 하이츠부터 매곡 네거리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는 나중에 새로 만들어진 길이다. 지금의 강창 하이츠, 한서 아파트, 삼산 아파트 지역은 원래 천지 돌산이었던 곳으로, 모암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죽곡산 줄기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네거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산줄기와 지금의 동서 아파트 뒷산이 만나면서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왕선고개이다. 이 고개 자락이 곧 왕건의 재생지처가 되었다. 직접 출전한 전투에서 패하여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도주를 거듭한 끝에 이른 왕선 고개, 그곳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숨 돌려 새로운 재기의 결의를 곧추세웠던 것이다. 이곳에서 달구벌 대로를 따라 낙동강을 건너 고려의 지지 세력이었던 성주군에 이르러서야 왕건은 비로소 견훤의 추격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의의]

왕선고개는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의 도주 과정에서 남겨진 지명과 관련한 속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왕건의 도주로를 장황하게 나열한 까닭은 그 행로의 연결선이 일관성 있게 이어진다는 측면에 더하여, '왕선'이라는 용어가 주는 의미이다. 속전이 지명에 남다보니 왕건이 쉬어 갔다는 '왕쉰'의 변화, 왕건이 다시 섰다는 '기신(起身)'의 의미 등 다른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건이 생사를 다투는 도주 과정에서 편히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경주를 구하지 못하고 패전한 심정을 정리하여 미래에 대한 의지를 다시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곳은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의 왕선 고개 만이 가능할 것이다. 성주와 접경지라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왕선 고개에서 마련된 왕건의 새 삶과 결의는 930년 안동 고창 전투, 934년 운주 전투를 거쳐 마침내 936년 일리천 전투의 승리를 마지막으로 후삼국 통일의 완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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