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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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李氏 |
영어공식명칭 | Yeongcheon I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입향 시기/일시 | 1630년 - 영천이씨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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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영천 - 경상북도 영천시 |
입향지 | 영천이씨 입향지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
세거|집성지 | 영천이씨 세거지 -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
성씨 시조 | 이문한 |
입향 시조 | 석병 이휴운 |
[정의]
고려 초기 영천 출신 평장사 이문한을 시조로 하고 석병 이휴운을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에 세거한 성씨.
[개설]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영천이씨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이영, 이동간, 이사경, 이익룡, 이항춘, 이형천, 이휴운, 이언직 등이 있다.
[연원]
영천이씨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시조 이문한(李文漢)의 후손들이 영천에 세거하면서 이씨일문을 이루었다. 이후 영천이씨는 이약(李約)을 파조로 하는 서승공파(署丞公派), 이대영(李大榮)을 파조로 하는 영양군파(永陽君派), 이중영(李仲榮)을 파조로 하는 울산공파(蔚山公派)로 분파되는데, 대구 동구의 영천이씨는 영양군파 이대영의 5세손 이헌의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영천이씨(永川李氏)는 고려 초기 영천(永川) 출신 평장사 이문한(李文漢)을 시조로 하며, 고려 말 군기시소윤을 역임한 영천 출신의 낙은(洛隱) 이헌(李軒)이 1350년(충정왕 2) 경에 예안으로 이거하였다. 이헌은 이파(李坡)와 이오(李塢) 형제를 두었고, 이파는 이효손(李孝孫)과 이성손(李誠孫) 형제를 두었으며, 이효손은 이흠(李欽)과 이균(李鈞) 형제를 두었고, 이흠의 아들이 바로 청백리에 녹선되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이다. 이현보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이석량(李碩樑)·이문량(李文樑)·이희량(李希樑)·이중량(李仲樑)·이계량(李季樑)·이숙량(李叔樑)·이윤량(李閏樑)·이연량(李衍樑)이다. 8형제 중 4자인 이중량은 문과에 올라 예조 참의가 되었는데, 바로 단암(檀巖) 이사경(李士慶)[1563~1628]의 조부이다. 아들 이영승(李令承)을 거쳐 단암 이사경에 이르러 고향 안동 예안의 분천을 떠나 대구부 해안현(解顔縣)[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으로 정착하였고, 1630년(인조 8)에 그의 아들 석병 이휴운(李休運)[1597~1668]이 대구부 입석리(立石里)[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에 터를 마련하여 입향하였다.
[현황]
단암 이사경은 고향 안동 예안[경상북도 안동시 예안읍]의 분천을 떠나 대구부 해안현(解顔縣)으로 정착하였고, 그의 아들 석병 이휴운이 1630년에 드디어 대구부 입석리에 터를 마련하여 입향하였다. 그는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이괄(李适)의 반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만년에는 금호강 가에 적지정사(積智精舍)를 지은 뒤 경전과 역사서를 탐독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이휴운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행직(行直)·우직(友直)·정직(珽直)·언직(言直)·심직(心直)이다. 이들 후손들을 중심으로 대대로 이곳 입석리에서 생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병자호란 이후 대구 대명동에 은거하여 존명배청(尊明排淸) 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 채 산수 사이를 유유자적하며 삶을 마감한 명호산인(明湖散人) 이언직(李言直)[1631~1698], 만년에 구원정(九元亭)을 지어 성리학 공부에 매진했으며, 또 『대동만성충효록(大東萬姓忠孝錄)』과 『백행집(百行集)』같은 충효에 관한 책들을 펴낸 구원정(九元亭) 이형천(李亨天,)[1650~1709], 만년에 요산당(樂山堂)을 지어 학문연마에 매진하여 『귀감록』, 『속염락』, 『속아송』, 『소학도찬』, 『심경의전』, 『주서석의』, 『예설통편』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고, 또 조상을 뛰어넘는 효성으로 ‘술효(述孝)’라는 사시(私諡)가 붙여진 요산당(樂山堂) 이익룡(李翼龍)[1732~1784], 조상의 음덕과 훌륭한 행실 및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침산(砧山) 이동간(李東幹)[1757~1822] 등이다. 입석동 영천이씨는 이들을 중심으로 농암 후손 중에 가장 활기차고 매력적인 가문으로 이어져 왔는데, 특히 농암 이현보 가문의 ‘효’ 사상을 잘 계승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일제가 1930년에 우리나라 성씨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 입석동 영천이씨는 약 60가구 정도가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도시화되면서 집성촌으로써의 기능이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