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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극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950
한자 自由劇場
이칭/별칭 영락좌,영락관,대구동보영화극장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지명/시설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69-1[화전동 1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관|개장 시기/일시 1928년 8월 4일연표보기 - 영락좌 개관
개칭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영락좌에서 영락관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3년 4월연표보기 - 영락관에서 대구동보영화극장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연표보기 - 대구동보영화극장에서 영락관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6년 8월 1일연표보기 - 영락관에서 자유극장으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2년 3월 8일연표보기 - 자유극장 폐관
최초 설립지 자유극장 -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69-1[화전동 14]지도보기
성격 극장
면적 880.95㎡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화전동에 있던 극장.

[건립 경위]

자유극장은 대구시민에게 영화, 연극 등을 제공할 문화의 전당으로 건립하였다.

[변천]

자유극장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8월 4일 이마모토 시미즈[今本善造]가 대구부 전정(田町)[다마치] 14번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화전동 14번지에 2층의 요세[재담, 만담, 야담 등을 들려주는 대중 연예장]를 개관한 것이 시작이었다. 영락좌(永樂座)[에이라쿠자]는 4일부터 4일간 나니와부시[浪花節]의 중진인 히로사와 교후[廣澤曉風] 일행을 초빙하여 개막 공연을 하였다.

1930년 무렵에는 닛카스[日活] 영화를 상영하는 활동 상설관 영락관(永樂舘)[에이라쿠칸]으로 바뀌었다. 1933년에 증개축하였으며, 1943년에 개축하고 대구동보영화극장(大邱東寶映畵劇場)[대구도호영화극장]으로 관명을 바꾸었다. 해방 후 ‘영락관’이라고 했다가 1946년 8월 1일부터 이후근(李厚根)·김광인(金光寅)·김기철(金基喆)이 자유극장으로 바꾸었으며, 2002년 3월 8일 폐관하였다.

1996년부터 2개 관으로 운영하였다. 2002년 3월 4일에 마지막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상영하고, 3월 8일에 폐관하였다.

1930년 무렵에 경영자는 나가오 기주로[長尾喜重郞]였다. 1934년 12월 영락관 경영 등을 목적으로 대구영흥상회를 설립하였으며, 호리코시 유지로[堀越友二郞]가 경영자였다. 해방 직전 일본인 하야시 고메이리[林米八]가 경영하던 것을 해방이 되자 구강회(具漮會)가 인수하였다. 1950년 3월에 김영태(金永台)가 인수하였으며, 그 후 박원종(朴元鍾)이 운영하였다. 1957년 5월에는 최상덕(崔尙德)이 운영하였다.

1930년 7월 26일부터 「동경 행진곡」과 「검도가 인츠즈지로[劍道家 吋次郞]」를 상영하였다. 1935년에 「조종초(釣鍾草)」·「춘설백일몽(春雪白日夢)」·「낭진분케[娘振分け]」, 1936년에 「가족회의」, 「오오의 봄[五五の春]」, 「백키왕자[白き王者]」, 1937년에 「이달경염록(伊達競艶錄)」, 「욕조의 화가[浴槽の花嫁]」, 1938년에 「대지(大地)」 등을 상영하였다.

1943년 8월 3일~1943년 8월 6일에 조선악극단이 공연하였다. 1944년에 「해협의 풍운아[海峽の風雲兒]」, 「강호의 조무[江湖の朝霧]」, 방한준 감독의 「거경전(巨鯨傳)」[서월영, 김일해, 독은기 주연] 등을 상영하였다. 1944년 12월 31일~1945년 1월 2일까지 「전국일번대(戰國一番待)」를 상영하였다.

[구성]

영락좌는 공사비 1만 2000원을 들인 244.63㎡[74평], 정원 600명의 2층 건물이었다.

1933년 당시 정원은 800명이었고, 닛카스·신코[新興]키네마·서양영화를 상영하였으며, 토키는 오더폰이었다. 1937년 1월 26일 최신 발성영사기인 인터내셔널영사기를 갖추었다. 1940년 12월 당시 경영자는 호리코시 유지로이고, 영사기는 미쿠니였다.

1957년 7월 당시 2층, 880.95㎡[266.49평], 35㎜ 영사기 2대, 자가발전기 2대, 수용 인원 1,100명, 종업원 20명이었고, 사장은 이후근(李厚根)이었다.

1958년 8월 당시 35㎜ 영사기 2대, 자가발전기 2대, 수용 인원 1,100명, 종업원 14명이었다.

1964년 4월 당시 수용 인원 706명[좌석 564, 입석 142], 종업원 23명이었다.

[현황]

현재 의류 매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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