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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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勞動會 所屬 精米工 罷業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1927년 11월 대구 지역 대구노동회 소속 정미공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를 반대하며 일으킨 노동쟁의.
[개설]
운수 노동자 친목계는 1923년 7월 설립되었다. 신재모, 김광서, 김학삼, 서병하, 김성곤, 장춘동 6명이 주축이 되어 운수 노동자 30여 명을 규합하여 설립하였다. 대구역 화물 운반 노동자 400여 명은 1925년 10월 23일 오후 1시 만경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친목계의 명칭을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로 변경하였다. 이후 1927년 5월 29일 총회를 열어 6월 1일부터 대구노동회로 회명을 변경하였다.
[경과]
대구노동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운반 노임 인하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1927년 11월 대구 원대동 일대의 정미소 노동자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대구의 서부 지역 곧 달성정, 원대동 일대에는 19여 개의 정미소가 밀집되어 있었다.
1927년 11월 정미소 업주들이 노동자의 운반 노임을 일방적으로 인하하여 지급하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은 업주를 상대로 일방적인 운반 노임 인하에 대하여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업주들의 거부로 임금 논의는 실패로 끝났다. 당시 모두 대구노동회 회원이었던 정미소 노동자들은 대구노동회 간부들에게 파업을 논의하였지만, 대구노동회 간부들은 파업보다 협상안을 제시하여 간부들이 대신 업주와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업주들의 완강한 태도로 인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1927년 11월 7일 원대동 김성초(金聖初) 정미소 노동자 10여 명이 가장 먼저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27년 11월 8일 원대동 일대의 정미소 전체로 파업이 확대되었다. 대구 서부 지역 정미소 노동자의 파업이 확산되자 대구 동부 지역의 대구노동회 회원인 운송 노동자 40여 명도 동맹파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김성초 정미소에서 시작된 파업은 대구노동회 소속의 대구 서부·동부 지역 육체노동자 파업으로 확장되었다. 170여 명 노동자가 참여한 파업은 여러 차례 협상이 진행되었음에도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점차 장기화 양상을 띠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정미소 업주 중 일부는 임금인상 등을 내걸고 노동자들과 협상하기 시작하였다. 원대동 백내윤 정미소에서는 노동자를 착취할 수 없다며 한 가마니에 14전씩 임금을 지불하여 노동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또 동부 지역 운반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있던 진목운송점의 사장 진목심일이 대구노동회를 직접 찾아 사과를 표명함으로써 노동자들은 파업을 풀고 현장으로 복귀하였다. 한편, 파업 장기화로 일용직이었던 정미 노동자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대구노동회에서는 파업 노동자에게 백미 닷 되씩을 원조하기도 하였다.
[결과]
계속되는 협상에도 진척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들은 정미소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대구노동회는 파업 노동자를 모두 운송부로 편입시켰다. 이에 국제운송부 미야모토[宮本] 대구지점장과 몇몇 일본인 운송 점주들은 운송되지 못하고 야적되는 물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대구노동회 측과 협상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7년 12월 4일 임금협상이 타결되었다. 협상 타결로 한 달 이상 끌어오던 정미공 파업이 일단락되었다. 정미소는 다시 가동되고 대구역에 적체된 곡물은 곧바로 운반되면서 모든 게 정상화되었다. 이처럼 대구노동회는 대구역 일대를 넘어 대구의 서부와 동부 지역 곧 정미소 밀집 지역과 대구역 일대의 육체노동자 회원을 확보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 육체노동자들은 대구노동회 회원이 되어 대구노동회의 지원을 받으며 권익을 지킬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노동회가 정미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통하여 일본 정미소 업주로부터 임금인상을 이끌어 낸 파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