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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모직 대구공장 여공노동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235
한자 第一毛織 大邱工場 女工勞動運動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노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0년 6월 14일연표보기 - 제일모직 대구공장 여공 노동운동 시작
발생|시작 장소 제일모직 대구공장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지도보기
종결 장소 제일모직 대구공장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지도보기
성격 노사분규
관련 인물/단체 제일모직 대구공장

[정의]

1960년 6월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 있는 제일모직 대구공장에서 노조 운동 방해로 발생한 노동쟁의.

[개설]

1960년 6월 14일 제일모직 대구공장 여공 약 400여 명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제일모직 대구공장 여공들의 요구조건은 부당노동행위 즉각 중지, 152명에 대한 불법 휴직 조치 철회, 불법 폐업을 중지하고 정상 작업을 실시할 것이었다. 제일모직 대구공장 여공들은 회사 측의 휴업 조치가 노조 운동 방해 행위임을 간파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되면서 노동삼권과 이익 균점권을 보장하였는데, 1953년에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이 만들어져 노동법 시대가 열렸다. 또한 전후 자유당의 기간단체화한 대한노총에 반기를 들고 1959년에는 선명 노동운동을 제창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생겨난다. 이 시기는 4·19 이후이므로 노동정책에 대하여 우호적이던 시절이다.

[경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서는 노동운동 방해 책동을 비난하고 6월 18일까지 부당노동행위 즉각 중지, 152명에 대한 불법 휴직 조치 철회, 불법 폐업을 중지하고 정상 작업을 실시할 것 등 3가지 조건을 받아들이고 조업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에도 노동운동이 치열할 때는 조업 중단과 폐업 조치가 핑계를 꾸밀 수 있는 노조 방해 책략임을 회사 측에서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노조 내 분규가 야기된 원인은 회사에서 노조에 간부를 침투시켜 노조를 공장파와 사원파로 분열하는 전략이었다. 1960년 6월 17일 사원과 노조의 어용화를 지적하고 타도할 것을 요구하는 농성 투쟁을 전개하였고, 경상북도 도내에서도 회사의 공장폐쇄가 위법임을 들어 시정을 촉구함으로써 1960년 6월 20일부터 조업을 재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회사 측에서는 어떤 대책과 조치도 취하지 않아 제일모직 노조에서는 1960년 6월 22일 경상북도에 쟁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쟁의 보고서의 내용은 노조 결성 및 노동운동의 불법방해 즉시 중지, 152명의 공원에 대한 부당 휴직조치 즉시 철회, 공장 조업 즉시 재개 등이다. 제일모직 노조원 300명은 1960년 7월 4일에 공장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 투쟁을 전개하였다. 회사 측의 고발로 200여 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전 노조원을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이숙자 등을 비롯한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결과]

1960년 7월 4일 밤에 다른 기업체의 노조원 1,500여 명이 대오를 이루어 밀려와 농성을 지원하게 되었으며, 8월 10일에 신구 양파 노조는 노조의 통합 단일화를 위하여 해산하였다. 회사는 조업 개시 후 40일 이내에 결성하기로 하였고, 단일노조는 조업 개시 후 40일 내에 결성하기로 하고 외부 인사 및 외부 단체의 개입 또는 간섭을 받지 않기로 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일모직에서 일어난 노사 간의 싸움은 경찰이 회사의 입장을 옹호하고 노동자들에게 강권을 행사하는 등 자본의 힘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노조를 어용화하려는 회사의 기도에 반대하여 쟁의를 제기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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