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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735
한자 孫仁植
영어공식명칭 Son Ins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세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5월 10일연표보기 - 손인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손인식 광주 3·1운동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5일 - 손인식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75년 4월 21일연표보기 - 손인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손인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손인식 -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광주 - 광주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광주 - 광주광역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제4묘역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58-6]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손인식(孫仁植)[1894~1975]은 1894년 5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현 광주광역시]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후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 정광호(鄭光好)가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광주로 돌아와 만세 시위를 모의하면서 광주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어 서울의 만세 시위를 목격한 김철(金鐵)·최정두(崔正斗)가 김강(金剛)·최한영(崔漢泳)·황상호(黃尙鎬) 등과 함께 3월 5일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로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인쇄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 기독교인들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도립농림학교 학생들, 광주군민 등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때 광주에 머물고 있던 손인식도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시위는 저녁 무렵까지 지속되었지만 일제 헌병과 경찰이 무자비하게 시위 군중을 탄압하였고, 손인식도 체포당하였다. 손인식은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손인식은 1975년 4월 21일 사망하였다.

[묘소]

손인식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58-6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제4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손인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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