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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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信愛 |
영어공식명칭 | Baek Sinae |
이칭/별칭 | 박계화(朴啓華),백술동(白戌東)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덕제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소설가.
[개설]
백신애(白信愛)[1908~1939]는 1908년 5월 19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태어났다. 1923년 영천공립보통학교[현 영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종로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집에서 한문과 일본 중학 강의록으로 독학하였다. 아버지 백내유(白乃酉)는 친일파였으며, 영천과 대구 내당동에서 정미소와 직조공장 등을 운영한 부호였지만 외동딸 백신애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백신애는 1922년 백술동(白戌東)으로 개명하고 태어난 해도 1906년으로 두 살 더 늘려서 영천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3년 졸업과 동시에 대구사범학교 1년 단기 강습과에 입학하였고, 1924년에 졸업한 뒤 영천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29년 『조선일보』에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 투고한 소설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활동 사항]
백신애는 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25년 사회주의 단체였던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1926년에 활동이 발각되어 교사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각지로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여성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백신애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병원 생활을 자주 하였는데, 그럼에도 1927년 4월부터 6월경까지 시베리아에서 유랑 생활을 하였다. 시베리아 유랑 경험은 훗날 발표한 소설 「꺼래이」[『신여성』, 1934]의 중요한 제재가 되었다. 1929년 등단 이후 백신애는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1934년 소설 「꺼래이」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하였다. 백신애는 1938년 남편과 별거한 후 약 40일간 중국 칭다오[青岛]와 상하이[上海] 등을 여행하였고, 1939년 6월 25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백신애는 1934년부터 『신여성』, 『신가정』, 『개벽』, 『조선일보』 등 잡지와 신문에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에 단편 「복선이」[『신가정』], 중편 「정조원」[『삼천리』], 단편 「채색교」[『신조선』]·「적빈」[『개벽』]·「낙오」[『중앙』] 등을 발표하였다. 1935년에는 소년 소설 「멀리 간 동무」[『소년중앙』]를 발표하였고, 장편 「의혹의 흑모」[『중앙』]와 단편 「악부자(顎富者)」[『신조선』]를 발표하였다. 백신애가 1939년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은 「혼명에서」[『조광』]인데, 유작 「아름다운 노을」이 잡지 『여성』[1939~1940]에 발표되었다. 백신애의 작품은 대체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가난하고 무지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것들이다.
[묘소]
백신애의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