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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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洙千 |
영어공식명칭 | Kim Such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수천(金洙千)[?~?]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1919년 2월 16일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조카딸 김마리아가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였던 백남채(白南採)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김수천은 3월 8일 아침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이던 허범(許範)으로부터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오후 2시경 백기만(白基萬)·하윤실(河允實) 등과 함께 서문시장으로 향하였다. 서문시장에서는 오후 3시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앞서 서문시장에 와 있던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대구 성경학교 강습생 20여 명,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신명여자고등학교] 학생 50여 명,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순식간에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김수천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어 출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