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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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聖權 |
영어공식명칭 | Kim Seongkwon |
이칭/별칭 | 청산(淸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22년 1월 21일 - 김성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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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1년 2월 15일 - 김성권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다혁당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8월 - 김성권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8월 - 김성권 광복 후 출소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11월 - 김성권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 언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김성권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
몰년 시기/일시 | 2007년 5월 31일 - 김성권 사망 |
출생지 | 신천동 -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학교|수학지 |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다혁당 당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성권(金聖權)[1922~2007]은 1922년 1월 2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호는 청산(淸山)이다.
[활동 사항]
김성권은 1941년 2월 15일 권쾌복(權快福)·김효식(金孝植)·이동우(李東雨)·유흥수(柳興洙)·이종악(李鍾岳)·이홍빈(李洪彬)·박호준(朴祜雋)·문덕길(文德吉)·조강제(趙崗濟)·문홍의(文洪義)·최태석(崔泰碩)·이주호(李柱鎬)·서진구(徐鎭九)·이도혁(李道赫) 등과 함께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조직 다혁당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기존에 결성되어 있던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문예부와 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독립을 위한 실력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김성권은 다혁당의 예술부에서 활동하였다. 다혁당원들은 역사와 문화 관련 서적을 돌려보고 독후감을 발표하였으며, 국내외 정세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또한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는 대구 앞산 등지에서 학교에서 배운 교련 내용을 바탕으로 군사훈련을 하였으며,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교사가 되어 제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유능한 인재를 길러 독립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 8기생으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가택 수색 과정에서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윤독회(輪讀會)[문예부의 전신]가 발간한 항일 문예지 『반딧불』이 발각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 드러났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김성권도 이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1942년 1월 초 대전지방법원 예심부에 회부되어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출옥하였다. 김성권은 2007년 5월 3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성권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1998년 3월 1일에는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