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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13
한자 金大羽
영어공식명칭 Kim Dae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시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7월 10일연표보기 - 김대우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3월 - 김대우 평안남도 강동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7년 3월 - 김대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대우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 대표로 3·1운동 참여
수학 시기/일시 1921년 3월 - 김대우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과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5년 3월 - 김대우 일본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채광학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 김대우 평안북도 박천군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1월 - 김대우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수훈
활동 시기/일시 1930년 3월 - 김대우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5월 21일 - 김대우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9년 3월 15일 - 김대우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0년 4월 29일 - 김대우 단광욱일장 수훈
활동 시기/일시 1940년 9월 2일 - 김대우 경상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3년 8월 18일~1945년 6월 - 김대우 전라북도지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3년 8월 - 김대우 국민총력전라북도연맹 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4월 22일 - 김대우 훈4등 서보장 수훈
활동 시기/일시 1945년 6월 16일 - 김대우 경상북도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9년 2월 20일 - 김대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검거
몰년 시기/일시 1976년 4월 22일연표보기 - 김대우 사망
출생지 강동군 - 평안남도 강동군
학교|수학지 강동공립보통학교 - 평안남도
학교|수학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경성공업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규슈제국대학 -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친일파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경상북도지사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김대우(金大羽)[1900~1976]는 1900년 7월 10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상준(金商俊)은 소유 토지가 1487만 610㎡, 소작인이 80여 명에 달하는 대지주이자, 강동군 군참사(郡參事)와 학교 학무위원, 금융조합 부조합장 등을 역임한 지역 유력자였다.

[활동 사항]

김대우는 1913년 3월 평안남도 강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3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학생 대표로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강동군 군참사로 있으면서 강동헌병분견소장과 강동군수를 통하여 선처를 호소한 결과 1919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921년 3월 무사히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1925년 3월 규슈[九州]제국대학 공학부 응용지질학과를 졸업하였다.

김대우는 1925년부터 조선총독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1928년 2월 평안북도 박천군수를 지냈으며,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30년에는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장, 1934년 1월 16일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으로 고속 승진하였다. 1936년 5월 21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 재직하며 중일전쟁의 정당성과 한국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라디오 시국 강좌, 시국강연회 등을 계획하고 시행하였다. 특히 1937년 10월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는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하였다.

김대우는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이자 관변 단체의 수장을 지내며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였고 일제가 벌인 전쟁에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재직하던 1940년 4월 29일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을 받고 1943년 8월 18일부터 1945년 6월까지 전라북도지사로서 국민총력전라북도연맹 회장을 지냈다. 1944년 4월 22일에는 일제로부터 훈4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45년 6월 16일 경상북도지사로 임명되어, 1945년 8월 15일 대구의 경상북도청에서 해방을 맞은 김대우는 도청 직원들을 모아 놓고 패망 소식을 공식 발표한 후 신사(神社)를 참배하였다고 한다. 8월 16일 서울에 올라가 엔도[遠藤隆祚] 정무총감과 함께 조선인 지도자들과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였다. 1945년 10월 18일까지 경상북도지사직을 수행하고 미군정으로부터 도지사직에서 파면당하였다. 다음 날 경상북도청에 출근하여 여전히 자신이 도지사라고 주장하며 큰 소동을 벌였다.

김대우는 1949년 2월 20일 서울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승만에 의하여 반민특위가 와해되는 상황에서 김대우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1960년 제5대 총선에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김대우는 1976년 4월 22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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