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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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府修城碑 |
영어공식명칭 | Daegu-bu Suseongb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만촌동 90]|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06년 - 대구부수성비 김세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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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70년 - 대구부수성비 건립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84년 - 대구부수성비 김세호 사망 |
이전 시기/일시 | 1932년 - 대구부수성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735-4로 이전 |
이전 시기/일시 | 1980년 - 대구부수성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735-4에서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90으로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2년 3월 4일 - 대구부수성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6월 29일 - 대구부수성비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영남제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팔현길 248[만촌동 산90] |
현 소재지 | 대구향교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 |
성격 | 비석 |
양식 | 대석|비신|개석 |
관련 인물 | 김세호 |
재질 | 화강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92㎝[높이]|74㎝[너비]|45㎝[두께] |
문화재 지정 번호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조선 후기 비석.
[개설]
대구부수성비는 1869년(고종 6) 8월에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부임한 김세호(金世鎬)[1806~1884]가 1870년에 대구부성을 보수하고 그 사실을 기리고자 세운 비이다. 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건립 경위]
대구부성은 영조(英祖) 때 경상도관찰사 민응수가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쌓았다. 그 후 성이 오래되어 성벽이 훼손되었지만 제대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김세호가 1870년(고종 7) 봄에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이러한 과정을 대구부수성비에 기록하였다.
[위치]
대구부수성비는 원래 대구부성의 남문 밖에 있었다고 전하는데, 1906년(고종 43)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었다가 1932년 대구향교 경내로 옮겨졌고, 1980년 영남제일관을 재현하면서 현재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90으로 옮겨왔다.
[형태]
대구부수성비는 대석(臺石), 비신(碑身),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신 높이 192㎝, 너비 74㎝, 두께 45㎝의 규모이다.
[금석문]
대구부수성비에는 ‘수성비(修城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비문은 비의 앞뒤로 대구부성에 대한 소개와 수리 과정 등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1870년(고종 7) 봄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마쳤는데,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 위에 새로이 네 개의 누각을 세웠으며,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定海樓), 서를 주승루(籌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 하였다고 한다. 중간 부분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영조 임금 때 병진년 자사(刺史) 민응수(閔應洙)가 그 둘레를 따라 돌을 쌓고 문을 세웠다. 그러나 망루와 포대는 없었는데 아마도 포대를 만들 만한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백여 년 전 사이에 성가퀴는 무너지고 망루도 썩어 무너지고 모든 영남의 성벽의 모습이 쇠퇴하고 부서져셔 바야흐로 그것들을 수선하고 세워야 하였다. 힘든 일은 많고 힘은 모자라서 두려우나 능히 이룰 수가 없어서 하늘이 돕는 바를 따라 마음으로 일으켜서 재물을 내고 기쁘게 도와서 장정들을 모집하되 백성의 노역은 동원하지 않았다. 대저 7만 전을 치르고 8, 9개월 지나서야 공사를 마쳤음을 알리니, 체성의 높이는 더 높아졌고, 처음으로 돌을 쌓아 돈대를 만들고 누각을 세우니 남쪽은 선은(宣恩)이요, 동쪽은 정해(定海)요, 서쪽은 주승(籌勝)이요, 북쪽은 망경(望京)이다[英廟丙辰刺史閔公應洙因其周遭而築石建門矣然而樓櫓砲臺則闕如蓋未遑也距今百有餘年之間雉堞圮毁譙樓朽傾全嶺雄藩體貌凋弊方其修擧也役鉅力絀懼不克濟天之所助人亦順之發衆願而捐財欣助募丁夫而不用民力凡費七萬錢閱八九朔而功告竣體城則增其高而刱築石墩建標樓者曰南曰宣恩東曰定海西曰籌勝北曰望京].”
[현황]
대구부수성비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인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부수성비는 조선시대 대구 지역에 있었던 경상감영의 성곽을 보수한 사실을 비교적 정확히 기록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