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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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時至地區 三國時代 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병섭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2년 4월~1995년 3월 -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 영남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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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4년 7월~1995년 1월 -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4년 11월~1998년 4월 -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원소재지 |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 -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 |신매동|매호동|욱수동 일대 |
성격 | 생활유적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지구에서 발굴 조사된 삼국시대 유적.
[개설]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과 수성구 사월동에 있는 고인돌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이후 지표조사에서 대구 매호동 고인돌, 대구 욱수동 고분군, 대구 성동 고분군, 대구 가천동 고분군, 대구 옥산동 토기 가마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1992년 시지 지역이 택지 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발굴 조사가 시작되면서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2015년까지 50개소가 넘는 유적과 4만 점이 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위치]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노변동·신매동·욱수동·가천동·고모동·대흥동·삼덕동·시지동·연호동·이천동·매호동·사월동·성동, 경산시 옥산동·중산동·옥곡동 등 옛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동쪽으로는 남천, 서쪽으로는 연호산, 남쪽으로는 안산과 성암산, 북쪽으로는 금호강과 남천으로 둘러싸인 지역에 있다.
[형태]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 최초 발굴 조사는 시지택지개발 사업’과 관련하여 영남대학교 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순차적으로 추진되었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는 1992년 4월부터 1995년 3월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는데, 발굴 조사 도중 유적 파괴 행위가 일어나 발굴 조사 중단과 조사 재개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유적 파괴 행위가 일어남으로써 시지 유적 취락지에 대한 사적(史蹟) 가지정 조치가 취해졌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4년 7월부터 1995년 1일까지 욱수초등학교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후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의 3차에 걸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994년 11월부터 1998년 4월까지 단독택지 구간, 남측 도로 구간, 시지고등학교 부지에 대하여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시지 택지 개발 사업 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 이후에도 시지 유적에서는 개발 행위에 따른 발굴 조사가 계속 이루어졌는데, 대구 욱수동·경산 옥산동 토기 가마, 대구 노변동 고분군과 사직단, 매호동 주거지, 대구 가천동 고분군 등 중요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유적은 덧널무덤·돌덧널무덤·돌방무덤과 같은 고분, 집자리·수혈·도랑·우물·도로와 같은 생활 유적, 토기 가마·노 유구 등의 생산 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매호동에서는 3~4세기대 장방형 집자리 무리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 무리는 인접한 성동토성과 연계되는 생활 유적이다. 이후 5세기 대에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신매동·욱수동 등 시지지구 중심부에서 삼국시대 취락이 확인되고, 수성구 욱수동과 노변동 등의 주변 구릉에서 고분군이 축조가 확인됨으로써 무덤 영역과 생활 영역이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산 유적으로서 대구 욱수동·경산 옥산동 토기 가마가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산시가 경계를 이루는 구릉에서 조사되면서 시지지구 유적의 성격이 토기 생산을 비롯한 생산 활동을 전담하였던 집단의 취락이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 중 취락을 이루고 있는 유구는 지상식 건물지·수혈유구·우물·기둥 구멍·도랑유구, 도로유구 등이며, 출토되는 유물은 굽다리접시[高杯]·짧은목항아리[短頸壺]·긴목항아리[長頸壺]·굽다리사발[臺附碗], 사발[碗], 굽다리병[臺附甁], 토구[土球], 석구[石球] 박자[拍子] 등 다종다양하다. 생활유구 중 가장 많이 조사된 것이 수혈유구와 기둥 구멍인데 수혈유구는 원형·타원형·장방형·방형·부정형 등 다양한 형태로 확인되었다. 평면 형태가 원형·타원형·방형·장방형 등 정형성이 있고, 바닥이 불다짐되어 있거나 지면을 고르게 한 것, 부뚜막이나 화덕 자리와 같은 시설이 있는 것은 주거용으로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노벽(爐壁), 녹로축혈(轆轤軸穴), 회전대혈(回轉臺穴)이 확인되거나 토제박자(土製拍子), 송풍관편(松風管片), 슬래그 조각, 도가니 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생산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할 수 있다.
시지취락 내에서 무수한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는데, 정형성을 갖춘 것은 소수이고 대부분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다. 정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지상식 건물지로 파악되는데 12기가 확인되었다. 기둥 구멍의 배치 형태에서 원형·방형·장방형으로 구분되는데, 토기 제작과 관련된 집단의 주거 시설 또는 저장 시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은 36기 정도 확인되었다. 우물은 사람이 한 곳에 정착하여 오랜 기간 생활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시설물로 취락민의 식수 공급과 생산과 관련된 생활용수로 공급처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은 평면 형태에 따라 원형과 타원형이 나뉜다. 단면 형태에 따라서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것·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것·통형으로 구분되는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가 가장 많이 확인되었다.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에서 삼국시대 고분은 덧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 다시 돌방무덤으로 변화되어 갔다. 덧널무덤은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내부에 나무 덧널을 안치하는 구조이다. 순수하게 나무 덧널만 설치한 것[純粹木槨墓]과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 강돌이나 깬돌을 채우거나 돌덧널 형태로 벽석을 쌓은 것[積石木槨墓]으로 구분된다. 시지지구 유적에서 90기 이상 조사되었으며, 능선 정상부 아래의 사면부에 조성되어 있다. 대체로 4세기 중반·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5세기 중반 무렵에 소멸된다. 덧널무덤에서는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긴목항아리,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손잡이잔[把手附杯],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연질바리, 시루, 손칼[鐵刀子], 쇠도끼[鐵斧],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쇠낫[鐵鎌], 미늘쇠[有刺利器] 등이 출토되었다.
돌덧널무덤은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네 벽면에 돌을 쌓아 덧널은 만드는 구조이다. 시지지구 유적에서 조사된 돌덧널무덤은 1,400기가 넘으며, 전체 삼국시대 무덤 가운데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돌덧널무덤이 조성되던 시기에 시지지구 일대가 번성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돌덧널무덤은 능선 정상부 아래 사면에 주로 축조되는데, 일부는 정상부에도 축조된다. 시지지구에서 5세기 초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중심 묘제로 채용되었다. 돌덧널무덤에서는 굽다리접시, 뚜껑달린굽접시[有蓋高杯], 짧은목항아리, 굽다리긴목항아리, 큰 항아리[大壺], 손잡이항아리[把手附壺], 시루, 쇠도끼, 쇠화살촉[鐵鏃], 고리자루 큰칼, 발걸이[橙子], 재갈, 띠고리[鉸具], 쇠투겁창[鐵矛], 미늘쇠, 쇠방울[鐵鐸],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대구 가천동 고분군에서는 출자형금동관[出子形金銅冠]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돌방무덤은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형태로 널길[羨道]과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 가족묘처럼 여러 주검을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이 가능한 형태이다. 6세기부터 7세기 후반까지 조성되며, 삼국시대 최후의 무덤 형태이다. 돌방무덤에서는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뚜껑달린굽접시, 방울잔[鈴杯], 굽접시[臺附碗], 짧은목항아리, 굽다리긴목항아리, 손잡이항아리, 큰 항아리, 겹아가리 굽다리긴목항아리[附加口緣臺附長頸壺], 연질단지[軟質甕], 손칼, 낫모양철기[鎌形鐵器], 단야구[鍛冶具] 등이 출토되엇다.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에서 대표적인 생산 유적은 대구 욱수동·경산 옥산동 유적의 토기 가마이다. 모두 41기의 토기 가마가 조사되었고, 토기 가마와 관련된 배수로(排水路), 폐기장(廢棄場), 채토장(採土場), 수혈, 기둥 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는 구릉 경사면을 굴식으로 굴착하여 축조한 지하식, 지표를 일정 깊이로 수직 굴착하여 바닥을 마련하고 벽체의 일부나 천장을 지상에 노출되게 축조한 반지하식, 선축된 가마가 폐기되어 매몰된 후 그 면을 정지하여 축조한 지상식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가마의 형태는 연소실과 소성실의 너비가 비슷하며 폭이 좁고 긴 세장형과 장방형 또는 타원형 소성실에 연소실의 폭이 좁혀진 형태로 구분된다. 가마는 사면 아래쪽에 아궁이가 있고 뒤쪽으로 연소실, 소성실이 별도의 구분 없이 일직선상에 있는 단칸 구조이다. 가마와 폐기장에서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긴목항아리, 단지, 손잡이 달린 사발, 뚜껑, 시루, 통모양그릇받침[筒形器臺], 바리모양그릇받침, 연질토기, 토우(土偶), 그물추[漁網錘], 흙구슬[土球] 등의 토제품과 장고 모양, 굽다리 모양, 고리 모양 등의 다양한 형태의 도지미[陶枕]가 출토되었다. 시지지구 토기 가마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운영된 당시 지역 최대 규모의 토기 생산 유적이다. 여기서 생산된 토기들은 지역 최고 수장층 고분군이 있는 경산 임당 고분군을 비로하여 시지지구 각 고분군과 취락에 공급되었다.
[현황]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은 발굴 조사 완료 후 대부분 택지 개발이 이루어져 원형을 찾기 어렵다. 대구 노변동 고분군 일부는 조선시대 사직단과 함께 현장 보존되고 있으며, 대구 욱수동·경산 옥산동 유적의 가마 중 양호하게 남아 있는 6기는 현지 보존·정비되어 있고, 나머지 가마 중 1기는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교육용으로 이전 복원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은 건물지와 수혈유구, 우물, 도로, 기둥 구멍, 도랑 등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취락지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삼국시대 대규모 생활 유적다. 또한 대규모 고분군과 토기 가마터가 발굴되어 생활 공간과 무덤공간, 생산 시설 간의 상호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복합 유적으로서 삼국시대 취락의 공간 배치 계획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학술적으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개발 과정에서 유적 파괴 행위가 일어남으로써 개발과 유적 보존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는 제도적 미비점도 확인되었다. 대구 시지지구 삼국시대 유적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학술적·사회적 의미가 우리나라 고고학 발전과 발굴 제도 변화에 큰 획을 그었으며, 문화재 발굴 조사와 보존 정책의 방향을 크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