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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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上洞支石墓群 |
이칭/별칭 | 대구 상동 지석묘군,신천 우안의 고인돌,신천 유역의 고인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80|상동 501|공원순환로 201[성당동 187]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민선례 |
조성 시기/일시 | 청동기시대 - 상동지석묘군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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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7년 12월 - 상동지석묘군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8년 11월 16일~1999년 2월 28일 - 대구 상동 고인돌Ⅰ국립대구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1년 3월 23일~8월 30일 - 대구 상동 고인돌Ⅲ 2차 발굴 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4월 20일 - 상동지석묘군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6월 29일 - 상동지석묘군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대구 상동 고인돌Ⅰ -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501 일대 |
현 소재지 | 대구 상동 고인돌Ⅱ - 대구광역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성당동 187] 일대 |
현 소재지 | 대구 상동 고인돌Ⅲ -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80 일대 |
원소재지 | 대구 상동 고인돌Ⅱ -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29 일대 |
성격 | 고분 |
양식 | 고인돌|돌널무덤 |
관리자 | 대구광역시 수성구 |
문화재 지정 번호 | 대구광역시 기념물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일대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무덤.
[개설]
상동지석묘군[고인돌]은 대구를 관통하는 신천을 따라 형성된 자연제방 위에 나란하게 분포하고 있어 ‘신천 우안의 고인돌’ 또는 ‘신천 유역의 고인돌’로 불린다. 2006년 4월 2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대구 상동 고인돌Ⅰ은 신천이 대구분지로 유입되는 곳 근처의 수성못 서쪽에 인접하여 있다. 신천을 따라 남북으로 흩어져 4기가 남아 있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501번지 일대이다. 대구 상동 고인돌Ⅰ의 북쪽으로 1㎞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구 상동 고인돌Ⅱ[상동 29번지 일대]와 대구 상동 고인돌Ⅲ[상동 80번지 일대]이 있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67년 12월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상동 고인돌에 대한 조사를 하였지만, 고인돌 덮개돌[상석] 아래에서 무덤이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1998년 11월 16일부터 1999년 2월 28일까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진행한 대구 상동 고인돌Ⅰ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하여 고인돌의 하부 구조로 추정되는 돌널무덤[석관묘] 38기와 돌무지[적석] 3기가 확인되었다. 대구 상동 고인돌Ⅲ이 있는 정화여자중·고등학교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고인돌과 관련된 조사는 2001년 3월 23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된 2차 발굴 조사에서 이루어졌는데, 청동기시대 고인돌 1기와 돌널무덤 5기 이외에 청동기시대 집터[주거지], 조선시대 집터, 화덕자리[노지], 우물, 폐기장 등이 확인되었다.
[변천]
대구 상동 고인돌Ⅱ는 고인돌 덮개돌[상석]이 15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덮개돌은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의 크기는 220~370㎝, 폭 130~273㎝, 높이 40~195㎝ 정도이다. 대구 상동 고인돌Ⅲ은 구 정화여자중·고등학교 부지에 해당되며, 주변 들판에 분포하고 있던 고인돌 덮개돌 수기가 옮겨져 있었다. 그리고 구 정화여자중·고등학교 가사실 남쪽에 190×147×75㎝ 크기의 고인돌 1기가 있었다. 1972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할 당시 가사실 증축 공사로 인하여 고인돌 아래 돌널무덤은 파손되었으며, 돌널무덤에서는 이단병식석검이 출토되었다. 2001년 3월 23일부터 8월 30일까지 2차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대구 상동 고인돌Ⅲ은 ‘대구 상동 74유적’으로도 불린다.
[형태]
상동지석묘군에서 조사된 고인돌의 덮개돌은 들판에 모여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들이 많아서 대부분 고인돌 덮개돌 아래에서는 무덤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덮개돌 주변에서 고인돌의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돌널무덤이 많이 확인되었다. 덮개돌을 갖춘 대구 상동 고인돌Ⅲ 2호묘에서는 188×135×90㎝ 크기의 덮개돌 아래 1기의 지하식 돌널무덤이 확인되었다. 돌널무덤은 대부분 파괴되어 길이는 알 수 없지만, 너비 70㎝, 깊이 50㎝ 정도이다. 벽석은 냇돌을 이용하여 정연하게 석곽형[돌덧널형]으로 쌓았으며, 바닥석과 개석은 판석을 이용하였다. 돌널무덤은 먼저 묘광(墓壙)을 파고 바닥에 시상석(屍床石)을 깔고 할석, 냇돌, 판석 등을 이용하여 돌널을 쌓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출토 유물]
상동지석묘군과 돌넛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간돌칼[마제석검]과 간돌화살촉[마제석촉]이다. 대구 상동 고인돌Ⅰ-18호묘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그물추[어망추]가 특이하며, 관옥과 같은 치레걸이[장신구]나 토기류는 출토되지 않았다.
[특징]
상동지석묘군의 분포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비교적 한정된 범위 내에 매우 밀집된 무덤의 분포를 보인다는 점과 돌널무덤의 장축 방향이 동서와 남북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돌널무덤의 밀집 분포는 최근에 발굴 조사된 상동 1-64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상동지석묘군의 축조는 동서 장축의 무덤들이 먼저 조성되고, 이후 양쪽에 남북 장축의 무덤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태는 신천의 좁고 긴 자연제방 위에 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처음에는 자연제방을 따라 무덤을 배치하다가 차츰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양쪽에 무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축조는 대부분 구덩식[수혈식(竪穴式)]으로 알려졌으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상동지석묘군에서는 다양한 형태가 확인되었다. 대구 상동 고인돌Ⅰ-4·5·6호에서는 앞트기식[횡구식(橫口式)]의 구조도 확인되었고, 6호묘에서는 3차례에 걸쳐 주검받침[시상(屍床)]을 설치한 흔적도 확인되었다. 대구 상동 고인돌Ⅰ-1호묘의 서쪽 장벽에 접하여 불을 피우고 자갈을 채운 반원형의 돌무지 시설은 제의 행위(祭儀行爲)와 관련된 유구로 추정되며, 39호묘의 상석과 아래 돌무지 시설은 묘역을 표시하는 상징물이거나 제단일 가능성이 있다.
[현황]
대구 상동 고인돌Ⅰ은 현재 고인돌의 덮개돌만 모아 수성유원지 서편 주차장의 서쪽에 모아둔 상태였으며, 2006년 4월 2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대구 상동 고인돌Ⅱ는 1967년 발굴 조사 이후 덮개돌 중 5기만 구 정화여자고등학교 맞은편 식물원으로 이전하였으나 다시 두류공원 문화예술회관 앞으로 옮겨 놓았다. 대구 상동 고인돌Ⅲ은 구 정화여중·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로 현재 정화우방팔레스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아파트 내 서편 소공원에 청동기시대 고인돌 4기, 돌널무덤 3기, 집터 2기를 이전 복원하였다.
[의의와 평가]
상동지석묘군은 신천 유역에 분포하는 고인돌의 특징인 밀집분포와 계획성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다양한 무덤의 축조 형태, 지석묘의 지상화, 의례 행위, 앞트기식 구조의 확인 등은 신천 유역을 비롯한 대구 지역 고인돌을 포함한 무덤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