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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721
한자 國債報償運動 記念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141[태평로2가 1-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97년 10월 16일연표보기 -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5월 3일 -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현충 시설로 지정
현 소재지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141[태평로2가 1-1]지도보기
원소재지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141[태평로2가 1-1]
성격 기념비
관련 인물 김광제|서상돈
크기(높이, 너비, 두께) 230㎝[가로]|280㎝[세로]|420m[높이]
관리자 대구광역시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에 있는 국채보상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

[개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國債報償運動記念碑)는 ‘국채보상운동 90주년’을 기념하여 1997년 10월 16일 세운 기념비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세상에 알린 옛 북후정 정자 터인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에 세워져 있다.

[건립 경위]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는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세상에 알린 옛 북후정 정자 터에 국채보상운동 90주년을 기념하여 1997년 10월 16일 건립되었다. 대구민의소는 북후정에서 대구군민 대회를 개최하고 국채 보상 취지서를 낭독하였다.

[위치]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141[태평로2가 1-1] 대구시민회관 앞 인도에 있다.

[형태]

국채보상운동 기념비여영택이 글월을 맡고, 글씨는 정계조가 썼으며, 조형은 이상일이 맡았다. 2단 기단부 위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오석으로 만든 직사각형 형태의 기둥 1개, 4분의 1로 잘라 놓은 타원형 형태의 기둥 2개, 원반 형태의 물건을 들고 있는 3명의 사람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봇짐을 든 장수, 한복을 입은 여성과 남성이 각자 한 손을 들어 원반 형태의 물건을 들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성별, 신분, 직업에 상관없이 전 계층에서 참여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3명의 사람의 성별과 직업을 나타내는 조형물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금석문]

국채보상운동 기념비의 측면에는 “겨레 바탕 뛰어나나 갈기갈기 갈라지자 힘 모자라 억울하고 가난하여 서럽더라/ 이웃이라 도우는 척 덮어씌운 빚 덩어리 벗어 보자 횃불 든 곳 우리 대구 여기더라/ 삼천리 방방 곡곡 남녀 노소 가슴가슴 그 불길 활활 타서 광복으로 이어졌네”라는 찬사가 새겨져 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건립비문[가제]은 다음과 같다.

“이웃이라 도운다던 일본이 일천삼백만 원의 많은 빚을 가져와 우리를 침략할 터전 다지기에 쓰고 빚을 우리가 갚으라더라. 애국심으로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의 횃불을 드니 1908년 2월 21일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으로 말미암아 담배를 끊고 패물을 팔고 푼돈을 모으는 바람이 온 나라에 불더라. 이 운동은 장차 3·1 독립운동과 물산 장려 등 애국운동으로 이어지더라. 이 정신을 기림은 대구의 자랑이요. 나라 사랑의 기둥이다. 이 유서깊은 국채보상운동의 얼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와 대구상광회의소는 운동 발의 90주년을 맞아 250만 시민의 힘으로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를 세우다. 1997년 10월 16일 대구광역시장 문희갑 대구상공회의소회장 채병하”

[현황]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는 2007년 5월 3일 대구지방보훈청에 의하여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민족 최초 경제 구국 운동이자 구한말 민족 최대의 민족 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국채보상운동이 우리 민족 자주 독립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운동임을 알리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http://mfis.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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