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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턴회의 청원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11
한자 獨立公債 募集- 會議 請願書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세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종결 시기/일시 1923년 1월 9일 -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턴회의 청원서 이현수가 일본 경찰에 자수
발단 시기/일시 1923년 1월 -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턴회의 청원서 이현수가 일경에 자수하여 관련자들 체포
발단 시기/일시 1920년 8월 -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턴회의 청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북교통사무 특파원 자택 귀국
발단 시기/일시 1921년 -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턴회의 청원서 워싱턴회의 개최
발생|시작 장소 이현수 집 -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명곡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자금 모집|독립 청원
관련 인물/단체 윤현진|이시영|이현수|서장환|정팔진|임원조|이상철|박기석|대한민국임시정부

[정의]

일제강점기에 이현수가 대구 및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공채 모집 및 외국인 선교사, 국내 언론 등에 워싱턴회의 관련 독립 청원 운동을 전개한 사건.

[개설]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 이현수(李賢壽)[1895~?]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서기로 활동하던 중 경상북도 지방에 특파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위한 독립공채 모집, 미국 워싱턴회의에 즈음한 독립운동 홍보 인쇄물 배포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3년 1월 관련 인물 다수가 체포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921년 말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워싱턴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지만, 워싱턴회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921년 중반 워싱턴회의에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대표로 하는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또 워싱턴회의에 즈음하여 임시정부에서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외교연구회’를 조직하여 후원하였다. 한편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재필은 미주 교민들에게 호소하여 4만 5000여 달러에 이르는 거액을 모금하여 대표단 등을 후원하였다. 특히 구미위원부는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교민과 외국인들에게 판매하는 등 독립 외교에 필요한 많은 자금을 준비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도 『동아일보』 등이 워싱턴회의에 큰 관심을 보였고, 국내 한국인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임시정부는 미주 지역은 물론 만주, 연해주, 국내 등지에 연락원이나 특파원을 파견하여 광범한 자금 모집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이현수는 1919년 중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차장 윤현진(尹顯振)의 알선으로 서기가 되어 임시 정부 직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7월 이현수는 임시정부 교통차장 김철, 재무총장 이시영, 윤현진 등으로부터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공채 모집과 인쇄물 배포, 미국 의회 의원단 방문 등에 대비한 여러 활동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뒤 독립공채 증권 1,000원권 30매, 500원권 20매, 경상북도 달성군 등 3개군 ‘공채모집위원’ 임명장, 경북교통사무특파원 임명장, 독립운동 관련 문건 등을 받고, 1920년 8월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명곡동 자택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부근의 서장환(徐章煥)에게 등사판을 빌려 「경고문」과 『자유신보』 등을 인쇄하고, 기독교 신자인 정팔진(丁八鎭)[1897~?]을 통하여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각지의 관리와 부호, 대구 등지 외국인들에게 널리 배포하였다. 특히 정팔진은 임원조(林元祚)를 경상북도 영천군 교통사무지국장, 이상철(李相澈)을 경상북도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 박기석(朴奇石)을 경상북도 안동군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임명하고, 공채 모집에 노력하였다. 한편 대구, 평양, 전주의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워싱턴회의라는 절호의 기회가 왔으므로, 조선에 대한 원조와 동정을 구한다”라는 요지의 영문 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또한 워싱턴회의를 기회로 하여 독립운동이 필요함을 기재한 『자유지(自由誌)』를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 등에 발송하여 독립운동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워싱턴회의에 즈음하여 국내에서는 이상재(李商在) 등 13도 지역 대표 367명이 연명 날인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를 한국 대표단에게 보내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결과]

조선총독부의 경북경찰부는 1920년 8월부터 1921년에 걸쳐 경상북도 도내 한국인 관리와 부호 등에게 자주 독립운동 관련 문서가 우송되는 사실을 주목하고 수사에 나섰다. 결국 위협을 느낀 이현수가 1923년 1월 9일 일본 경찰에 자수하여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1월 말 ‘조선총독부 제령(制令)’ 위반 혐의로 이현수 외에 서장환[대구], 정팔진[대구], 임원조[대구], 홍재범[청도] 등 경상북도 일대 관계자 다수가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1922년 2월 초에 끝난 워싱턴회의 결과 상당수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 문제가 완전히 배제됨으로써 국내외에서 임시 정부의 권위가 떨어져 이후 한동안 독립운동이 침체하고, 문화운동이나 자치운동, 사회주의운동이 대두하는 등 민족운동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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