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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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組合 |
이칭/별칭 | 대구수형조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에 일제가 어음의 유통 저지 목적으로 설치한 금융 기관.
[개설]
일제는 1905년 화폐 정리 사업 직후 금융제도를 은행의 신설보다는 창고 및 어음 지급보증 등 전통적인 금융 기구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추진하였다. 일제는 1905년 9월 「수형조합 조례」 및 「약속수형 조례」를 공포하고, 한국의 전래 어음의 유통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어음조합을 설치하였다. 대구어음조합[이칭 대구수형조합]은 1906년 8월에 설치되었다.
대구어음조합의 임원은 조합장에 이석진(李錫珍), 부조합장에 최만달(崔萬達), 평의원에 이병학(李柄學)·이경천(李擎天)·정해붕(鄭海鵬)·문봉준(文鳳準), 이사에 야마모토[山本正雄], 통역에 김재규·윤창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대구어음조합의 조합원 수는 1908년 60명, 1910명 98명, 1912년 113명이었다.
[변천]
1906년 8월 설치된 대구어음조합은 1912년 7월 말 어음조합의 업무상 권리와 의무를 대구농공은행으로 이관하고 해산되었다. 대구농공은행은 1908년 8월 진주농공은행과 합병되어 경상농공은행이 되었다가 1910년 8월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되면서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어음조합은 일제가 화폐 정리 사업 이후 어음의 유통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대구에 설치한 기관이었다. 대구어음조합의 설치는 한국인 자산가들이 식민지 금융 기구에 ‘포섭’되는 의미를 지녔다. 일제의 화폐 정리 사업과 재정 정리 사업의 전개, 그 영향으로 나타난 한국인 금융 기구의 붕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