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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82
한자 大邱警防團
영어공식명칭 Daegu Fire Protection and Prevention Brigad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시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9년 10월 3일연표보기 - 대구경방단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대구경방단 폐지
성격 사회단체
설립자 조선총독부

[정의]

1939년 대구광역시에서 소방·방공·치안을 위해 조직되었던 단체.

[개설]

경방단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경방단 규칙」[1939. 7. 3.]에 의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개시 후 방공(防空)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치안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방호단(防護團), 소방조(消防組), 수방단(水防團)을 전시체제로 재편성하여 1939년 경방단으로 통합하였다. 경방단 설치와 동시에 방공 설비의 강화와 방공 사상의 철저한 보급 등을 위하여 조선방공협회(朝鮮防共協會)가 설립되었다. 1939년 10월 3일 조직된 대구경방단(大邱警防團)은 본부와 6개 분단으로 편성하고, 각 분단에 4개 부서를 두었다.

[설립 목적]

대구경방단은 전시체제 하에서 공습이나 재해로부터 시민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실제 목적은 전시 동원 체제 구축과 유사시 방공의 완벽을 기하여 치안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변천]

대구경방단은 1939년 10월 3일 대구역 앞 광장에서 결단식을 가졌다. 대구경방단은 1939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방공대훈련과 1940년 3월 10일 방공 사상 보급 캠페인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0년 4월 6일에는 대구공회당에서 경방단 단가(團歌) 발표회를 가졌고, 1941년 5월에는 대구경방단 제3분단 방공 사무소 및 방공호를 구축하였다. 대구경방단은 광복 이후 폐지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총독부는 1939년 7월 3일 「경방단 규칙」을 제정·공포하고 1939년 10월 1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경방단을 조직하였다. 전시체제 하의 후방에서 소방은 물론 유사시 방공, 방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수행할 목적이었다. 대구부(大邱府)에서는 1939년 8월부터 대구경방단 결성에 착수하여 부내(府內)를 6개 분단으로 편성하였다. 정병주의(精兵主義) 원칙에 따라 기존의 방호단원 중에서 35세 이하의 중견 단원으로 선발하고, 나이가 많은 단원은 가정방호조합(家庭防護組合)에 편입시켰다.

(1) 대구경방단 조직

대구경방단은 본부와 6개 분단으로 편성되었다. 본부에는 단장 오구치 하지메[小口肇]를 비롯하여 4명의 부단장을 두었고, 6개 분단에는 각 1명의 분단장과 2명의 부분단장을 두었다. 본부 직할로 상비소방부(常備消防部)와 특별경비원을 두었고 각 분단에는 경호부(警護部), 소방부(消防部), 방독부(防毒部), 구호부(救護部)의 4개 부(部)를 두었다. 경호부는 경보반(警報班), 등화관제반, 교통정리반, 피난소관리반, 경호반, 배급반으로 편성하였고 소방부는 소방반과 수방반(水防班), 방독부는 방독반, 구호부는 구호반으로 편성하였다.

(2) 대구경방단의 활동

대구경방단은 결단에 앞서 1939년 9월 30일 경방단 단기 전달식을 가졌다. 1939년 9월 30일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당시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전국 각지에서 온 대표자에게 단기를 수여하였다. 대구경방단에서는 오구치 하지메 단장이 기수(旗手)와 함께 참석하였다. 이후 대구경방단은 1939년 10월 3일 대구역 앞 광장에서 결단식을 가졌다. 경상북도 내 256개 경방단 결단식이 1939년 10월 1일에 일제히 열린 후였다. 고타키 모토이[上瀧基] 경상북도지사를 비롯하여 진해요새사령관, 경찰부장, 헌병대장, 대구부윤 등 각 관공서 관료 및 유지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대구경방단은 결단식을 가진 이후 1939년 10월 26일부터 11월 4일까지 경상북도 방공대훈련 연습을 시행하였다. 이때 슬로건은 ‘향토방위는 우리 손에’였다. 1940년 3월 10일에는 일본육군기념일을 맞아 방공 사상 보급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또한 모범 등화관제 요령을 전시하고, 대구부 내 각 정(町)에서 등화관제 실물교육을 실시하였다. 대구경방단은 시가전 연습에도 참가하여 1940년 3월 10일 오전 9시부터 중등학교 연합 연습에 구호반을 출동시켜 실제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무렵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경방단 단가인 「조선경방단의 노래(朝鮮警防團の歌)」를 현상공모하여 빅터레코드에서 녹음한 후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발표회를 열었다. 대구에서는 1940년 4월 6일 대구공회당에서 단가 발표회가 열렸다. 1940년 10월 4일에는 방공연습을 하던 중 대구공회당 3층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1년 5월에는 대구경방단 제3분단에서 방공사무소를 구축하였다. 본정소학교(本町小學校)[1918년 개교~1945년 폐교] 남쪽에 대구부 최초로 방공사무소와 방공호를 만들었는데, 공사비 1만 1500여 원이 들었다고 한다.

대구경방단은 1944년 1월 6일 오전 10시 대구신사(大邱神社)에서 시무식을 연 후 중앙통(中央通)에서 분열식을 거행하였다. 대구경방단은 전시체제 하에서 각종 방공훈련에 참가하고, 때로는 방공 사상 캠페인을 전개하다가 광복 이후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경방단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확대하던 일제가 공습으로 인한 화재 진압과 방공, 치안유지 등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를 위한 조직이었다. 경찰서장의 지도 감독 아래 한국인의 동향 파악과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시키는 등 경찰의 보조 역할까지 맡아서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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