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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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從軍作家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헌 |
[정의]
6·25전쟁 당시 문총구국대와 각 군별 종군작가단이 활동하면서 피란 문인과 지역 문인이 어우러져 전쟁 문단이 형성된 대구.
[문총구국대와 종군작가단]
대구는 6·25전쟁 발발 직후 대전에서 결성된 문총구국대와 1·4후퇴 이후 각 군별로 결성된 종군작가단이 활동하면서 피란 문인과 지역 문인이 어우러져 전쟁 문단이 형성된 곳이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는 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에 비상국민선전대를 조직하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발표하는 발표문과 벽보, 보도자료 등을 기안하였고 일부 시인은 방송국에 배치되어 애국시를 낭송하거나 격문을 발표하였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임시수도인 대전에서 조지훈의 주도로 문총구국대[총대장 김광섭, 대구지대장, 부산지대장 유치환]를 결성하였다. 조지훈, 박목월, 김윤성, 김송, 서정주, 임긍제 등이 대원으로 참여하였다. 대전에서 발족된 문총구국대는 이한직 시인을 대구로 파견하여 후방 문인들과 함께 1950년 7월 5일에는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를 결성하고 지대장에 이효상을 임명한다. 당시 대원으로는 김사엽, 박양균, 이윤수, 김진태, 최계복, 강영기, 김달진, 조상민, 백낙종, 류기영, 이호우, 김동사, 김상규 등이 있었다.
전세의 악화로 대전에 있던 문총구국대 본부가 대구로 오면서 문총구국대 경북지대와 합류하면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 만경관 극장에 본부를 두고 국방부 정훈국과 협조하여 대민방송의 원고 작성, 위문공연과 시국강연 등을 열었다. 대구시 중앙방송국에서 시와 콩트 등을 낭송하고, 『전시시첩』 제1집[1950년 8월]을 발행하였다. 문총구국대는 육군 정훈국 소속으로 1950년 9·28수복 때까지 약 3개월 남짓 종군활동을 한 후 해산한다.
1951년 1·4후퇴 때 대구는 다시 피란 문단이 형성된다. 해산하였던 문총구국대는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각 군별로 종군작가단을 결성한다. 대구를 중심으로 지방 문인들과 합류하여 휴전될 때까지 육·해·공군 각 군별 종군작가단으로 나누어 종군하면서 반공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가장 먼저 조직된 종군작가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공군종군문인단[일명 창공구락부, 1951년 3월 9일]이다. 약 2개월 뒤인 1951년 5월 26일에 육군종군작가단이 대구에서 결성된다. 가장 늦은 해군종군작가단은 1951년 6월 부산에서 결성되었다. 지방 문인들과 합류하여 휴전될 때까지 육군, 해군, 공군 종군작가단은 반공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공군종군문인단은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 공군본부 정훈감실에서 창설되었다. 단장은 마해송, 부단장은 조지훈, 사무국장에는 최인욱이 임명되었다. 1951년 4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공군종군문인단은 『창공(蒼空)』[1953년]이라는 잡지를 2호까지 발간하였고 『코메트』라는 기관지 편집을 담당하였다. 공군 기관지 『코메트』는 1951년 6월 1일 창간된 『공군순보(空軍旬報)』를 1952년 11월 15일 개칭하여 발행한 잡지이다. 『코메트』 창간호는 20호[1952년 11월 15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공군순보』를 그대로 계승하여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953년 1월 15일에 발행된 『코메트』는 2호로 표기되어 있다. 참여한 단원은 최정희, 곽하신, 박두진, 이호우, 방기환, 김윤성, 이한직, 이상로, 황순원 등이다. 대구 지역 문인으로는 조지훈, 박목월, 이윤수, 최광렬, 김동리, 박훈산이 합류하였다. 단원들과 문인들은 공군 정훈감실에서 문관처럼 활동하면서 조종사들의 활동을 일간 신문, 잡지 등에 종군기(從軍記)로 남겨 후방에 알리고 종군하면서 얻은 소재로 창작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이를 통하여 군 내부적으로는 사기 앙양과 정서 함양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는 일반 항공 사상을 전파하였다. 한편 공군종군문인단은 1952년 1월 15일~16일에 육군종군작가단과 함께 ‘건군기념예술제전’을 대구 자유극장에서 개최하였고 1952년 6월 6일~8일에는 대구 문화극장[현 CGV 대구한일]에서 문인극 「날개 춘향전」[최인욱 각색]과 김영수의 「고향 사람들」 등을 공연을 하였다. 이렇게 공군종군문인단은 육군종군작가단과 연합하여 종군 결과 보고대회, 시국강연회, 기념 예술제 등을 열었다.
육군종군작가단은 1951년 5월 26일에 대구에서 육군본부 정훈감실 육군 대령 박영준의 주선으로 공군문인단 단원이었던 구상이 김기진(金基鎭), 최상덕(崔象德), 장덕조 등과 함께 결성하였다. 최독견을 단장으로 하여 부단장 김송, 상임위원 박영준, 이덕진 등이 있었고, 단원으로 장덕조, 최태응, 조영암, 정비석, 정운삼, 성기원, 박인환, 방기환, 김진수, 김영수, 김용환, 손소희, 하대응 등이 활동하였다. 지역작가로는 구상과 유치환, 이호우, 박기준 등이 참여하였다. 아동문학가 윤석중도 참가하였다. 1951년 12월 1일에 아담 다방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1차 단원을 보강하였다. 이때 김팔봉을 비롯하여 구상, 장만영, 박귀송, 박기준, 작곡가 김동진과 출판 관계자 황준성, 김현송, 노준석 등이 가입한다. 단원 보충으로 활력을 얻은 육군종군작가단은 당시 영남일보사[사장 김영보]에 사무실을 두고 종군 활동과 작품 활동 등 기존 사업 이외에 기관지 『전선문학』[1952년 4월의 1호부터 7호까지 발행] 발행과 정기적인 방송을 추가하고 대구방송국에서 매주 30분씩 정기방송을 담당하였다. 육군종군작가단은 타 종군작가단에 비하여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6년 동안 종군 횟수 220회, 보고 강연 8회, 문학·음악의 밤 8회, 문인극 2회 등을 하였고, 부정기 간행물 『전선문학』을 발간하여 정훈 문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첫 사업으로 매월1회 일선 종군, 종군기 발표, 종군보고 강연회 개최, 종군 문집 발간 등을 내세웠다. 이후 단원이 확충되면서 기관지 발간, 종군 문학 방송, 연극 발표, 지방 순회강연, 군가 작곡 등으로 사업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상덕을 비롯하여 김팔봉·구상·박영준 등은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파란지 대구 문단]
6·25전쟁 중 대구는 종군작가단 문인들과 지역 문인들로 피란 문단이 형성되는데, 피란 문단에서는 종군 활동 이외에 1951년 10월에는 ‘상화’와 ‘고월’의 이름을 딴 상고예술학원[초대원장 마해송]을 설립하였다. 소설가 박종화를 비롯한 김팔봉, 김동리, 김영수, 장덕조, 최정희, 정비석, 최상덕, 최인욱, 박영준 등이 발기하여 대구 남산동 교남학교 교사를 빌려 사용하였다. 문학, 음악, 미술 3개 학과를 6개월 과정으로 운영한 단기 강습 학원이었다. 강사는 조지훈, 최정희, 최인욱, 구상, 유주현, 박훈산, 장덕조 등이었고 대상은 주로 중고등학교 교사들이었다. 상고예술학원에 동참한 문인들은 시인 이은상, 오상순, 유치환, 구상, 조지훈, 박목월, 양명문, 김달진, 박귀송 그리고 아동문학가 마해송, 수필가 전숙희, 국문학자 양주동, 이숭녕, 평론가 최재서 등이었으며 그 밖에 대구 지역 문인으로 백기만, 이효상, 이호우, 이설주, 이윤수, 김동사, 김사엽, 왕학수 등이 참여하였다. 1952년 2월 첫 수료생을 배출하였지만 휴전회담이 진전됨에 따라 피란 문인들이 환도하였고 이설주가 2대 원장을 맡았으나 경영난 등으로 2년 만에 폐원하였다.
피란지 대구는 다방, 술집, 언론사 등에서 많은 문인들이 창작과 문화행사를 하였다. 대구 중구 향촌동 일대에 있던 다방은 문인들의 출판기념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문인들 사이에 이름 난 다방은 백조, 모나미, 꽃자리, 청포도, 백록, 호수, 상록, 몽파리, 살으리, 낙양, 가고파 등이었다. 1951년 향촌동 ‘모나미’ 다방에서 이효상 시인의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1953년에는 ‘상록수’ 다방에서 박두진의 시집 『오도』, ‘살으리’ 다방에서 소설가 최인욱의 첫 단편집 『저류(底流)』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한편 막걸리집으로는 옛 영남일보 맞은편 골목길 안에 있던 ‘감나무집’, 동성로에 있었던 ‘석류나무집’, 남산동 언덕에 있었던 ‘도루메기집’, 대구향교 북쪽 건너편에 있었던 ‘말대가리집’ 등이 피란 문인들의 합숙소와 같은 역할을 할 정도였다.
국방부 기관지였던 『승리일보』의 주간을 맡은 구상은 1·4후퇴 이후에 대구 영남일보 사무실을 집무실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영남일보』는 종군작가와 피란 문인들로 붐볐고, 전쟁 관련 시·소설 그리고 평론, 시사만화, 동요,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다수 실었다. 신동집은 1950년 9월 3일자 신문에 시 「조국으로 가는 길」을 발표였고, 문총구국대 경북지대장이었던 이효상도 1950년 9월 6일자 신문에 시 「전쟁」을 발표하였다. 김동리는 연재소설 「스딸린의 노쇠」를 1951년 6월 7일부터 18일까지 총 8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스딸린의 노쇠」는 말년에 이른 스탈린의 내면을 다루었다. 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이었던 조지훈도 1952년 1월 1일자 『영남일보』 신년호에 「1952년의 전망… 불안의 절정에서」라는 글을 통하여 당시 한국 문화계를 전망하였다. 또 정비석은 소설 「여성전선(女性戰線)」을 『영남일보』[1952년 1월 1일부터]에 연재하였다. 「여성전선」은 정비석의 대표작이 된 『자유부인』을 창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영남일보』 1951년 1월 4일자 신문에 수필 「대구신묘(大邱辛卯)」라는 수필을 발표하였다. 1953년에는 어린이의 인권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칼럼 「다음 代를 어떻게?」[1953년 2월 11일]와 「외국문화수입(상)(하)」[1953년 2월 9일, 1953년 2월 10일], 「화가 정점식」[1953년 6월 16일] 등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6·25전쟁기에 대구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한국 문단의 거점이 되면서 많은 전쟁 작품을 생산하였다. 전쟁 독려, 이념 고취, 장병 위무 등의 목적성 작품이 양산되었다. 이런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대구 지역 문인의 문학적 자생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전쟁기 대구 문학에서 정훈 매체 활동은 공군종군문인단의 『창공』과 육군종군작가단의 『전선문학』과 문총구국대 경북지대에서 발행한 『전선시첩』 1집, 2집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육군본부에서 『사병문고』를 1951년 4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발행하였다. 『사병문고』는 대구에서 발행되었는데 군 내부 배포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제1집은 대구 지역 작가 10명을 중심으로 단편집을 발행하였다. 그런데 단편집 발행 작업을 문학가가 아닌 정훈감 육군대령 박영준이 맡았다.
전쟁의 페허 속에서도 종군작가단과 피란 문인들의 작품 활동과 기고 등으로 대구 지역 출판사들은 군 안팎의 출판물과 작품집을 생산하며 성장하였다. 1953년 당시 일간지로는 『대구일보』,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시사신보』 등이 나왔고 잡지는 아동문학 잡지 『소년세계』[1952년 7월]와 『청조(靑鳥)다이제스트』[1953년 5월], 『한국공론』[1949년 12월~1952년 4월], 『시와 시론』[1952년 12월] 등의 잡지가 발간되었다. 이런 가운데 영웅출판사, 창조사, 현암사, 춘추사, 문호사, 문성당, 철야당 등의 출판사가 활발하게 출판사업을 이어 갔다. 그러나 이처럼 일간지, 잡지 그리고 다수의 출판사가 탄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문단은 중앙 문단에 흡수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즉 피란 문인들과 친목을 돈독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인 배출을 하지 못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문학 공부도 저조한 편이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전쟁기 대구 문학은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전쟁기 대구 문단은 한국 문단의 중심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