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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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邑城- 東西南北-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조선시대 대구광역시 중심부에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고 지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쌓았던 성곽.
[대구읍성을 쌓은 까닭]
대구 사람들에게 ‘시내에 나간다’는 말은 한 곳을 지칭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타원 형태의 도시에서 중심이 되는 곳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동성로를 가리킨다. ‘동성로’라는 명칭은 성의 동쪽 길을 의미하므로 이름에서부터 성이 있던 옛 시절을 소환하는 셈이다. 또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까지 있어 동서남북으로 길을 내고 우뚝 서 있는 성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 때문인지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그 흔적이 선명한 대구읍성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한 지역의 읍성(邑城)은 풍수적인 측면, 건축 기술과 토목 공법의 측면, 군사적 측면, 사회경제적 측면 등 다양한 전문 분야를 고찰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조선시대 읍성은 각 고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풍수지리를 고려한 가장 좋은 지형에 쌓았다. 군사적으로는 외적의 침입 시에 백성들이 대피하여 고을을 지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행정적으로는 성안의 고을을 관리하는 관아 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큰 규모의 행정구역에 세워진 읍성은 관청이 들어서고 백성이 거주한 중심지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읍성이 설치된 고을은 행정 등급이 높거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대구 또한 조선 후기 이전에 이미 주요 지방이었기에 읍성이 들어서게 된다.
대구의 첫 번째 읍성은 261년(신라 첨해왕 15)에 쌓은 달벌성[달성]이다. 지금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의 달성공원 일대에 남아 있다.
1590년(선조 23)에 이르러 대구에 읍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려면 부산 동래 지역에서 국왕이 있던 한양으로 향하는 직선로에 있는 경상도 내륙 도시에 성벽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에 있던 달벌성보다 동쪽에 새로운 토축 읍성을 쌓기로 하였다. 도호부사 윤현에 의하여 토축 읍성이 축조되지만, 불과 2년 뒤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토축 읍성이 파괴되고 만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의 기록에 따르면 “만력 경인년[1590년]에 읍성을 쌓을 때 선산·군위·인동 등 세 고을을 성 쌓기 공사에 보태어 민력의 동원을 완수하였다. 임진왜란 때 성이 부셔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 왜군, 명군은 모두 대구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 여겼기에 전쟁이 끝난 후 대구의 입지적 가치는 더욱 부각된다. 경상도의 중심에 있는 데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강이 흘러들어 시장이 발달한 점도 대구의 존재감을 북돋우었다. 1601년(선조 34) 대구에 드디어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경산과 하양, 화원을 대구에 편입시키며 큰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는 발돋움을 한다. 당시의 경상감영이 있던 터를 보전하기 위하여 현재도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는 경상감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경상감영공원 안에는 경상감영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이 남아 있으며 경상감영관찰사의 처소였던 징청각이 있는데, 선화당은 보물로, 징청각은 대구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간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 경주, 세종 시기에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상주 등 큰 도시에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칠곡 팔거현, 대구 달성, 안동 등을 거친 뒤 대구에 최종 정착한다. 조선 8도 중에서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것은 대구가 경상도의 중심지가 됨을 의미하였다. 1910년에 이르러 경상감영은 경상북도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6년 경상북도청을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서 북구 산격동으로 이전하였다가, 2016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시로 이전하였다.
경상감영이 세워진 뒤에도 ‘대구부읍성’ 축조 건의는 여러 차례 무산되다가 1735년(영조 11)에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응수가 조정에 아뢰어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에 축성된다. 민응수는 대구읍성 공사 과정을 기록한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를 세웠다. 뒷날 대구읍성을 헐게 되는 대구군수 박중양이 영영축성비를 옮겨 버렸다. 영영축성비는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망우공원의 영남제일관 앞에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영영축성비를 통하여 대구읍성의 규모와 공사 기간, 동원 인력과 운영 조직, 시설과 공정, 공사 자재의 공급 방식 등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대구읍성에는 동·서·남·북의 정문이 있고, 문에는 본루를 세웠는데 동은 진동문, 서는 달서문, 북은 공북문이라 칭하였고, 남문을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 하였다. 영남제일관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1980년대에 망우공원 안에 복원되었다. 현재 남성로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네거리에 영남제일관이 있었던 곳을 표시하여 둔 작은 표지석이 있다. 망우공원에 있는 대구부수성비, 영영축성비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영남제일관이 있는데, 누각에는 대구읍성의 모형과 터치스크린 방식의 모니터를 설치하여 관람객들이 역사를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읍성이 사라진 자리]
1870년(고종 7)에 이르러 경상도관찰사 김세호가 성벽을 높이는 등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동쪽에 정해, 서쪽에 주승, 남쪽에 선은, 북쪽에 망경루라는 4개의 표루를 설치한다. 대구부수성비에도 “체성을 더 높이고 너비도 확장하였고, 4대문을 중수, 돈대, 표루를 신설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굳건히 세워진 대구읍성은 또다시 일본과의 악연을 맞는다. 강화도조약 이후로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살게 되는데 1900년(고종 37) 대구에는 일본인회가 설립된다. 특히 1903년(고종 40)부터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는데 일본인들은 철도 건설 부지를 사들이기 위하여 대구로 몰려왔다. 철도공사 업자, 노동자, 상인 등이 대거 들어온 상황에서 대구에 은행까지 세워져 일본 화폐가 유통되기에 이른다. 이를 구실로 일본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대구에 주둔시키는 등 사회·경제·군사적 측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1905년 1월 1일부로 개업한 대구역 덕분에 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자 대구읍성의 북문과 동문 밖에서 장사를 하던 일본인 상인들은 상권을 확대하기 위하여 읍성을 철거하여 달라고 요청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 있던 읍성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읍성 철거령 및 시가지 확장, 신작로 개설, 철도 부설 등으로 강제로 철거되는데 기존의 관아 시설은 경찰서 등의 관공서로 용도가 바뀌거나 훼손되었다. 대구읍성의 경우 먼저 일본 상인들과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의도적으로 읍성의 허술한 부분을 무너뜨리고 다녔다. 그런 후 도리어 낡은 성벽 때문에 붕괴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성벽으로 인하여 다니기 불편하고 발전도 더디다는 등 억지 주장을 일삼게 된다. 일본인의 요구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이는 대표적인 친일 세력인 박중양이었다. 일본인 이와세[岩瀨靜], 나타에[中江五郞平], 사이토[齊藤芳造], 이토[伊藤元太郞] 네 사람과 극비 모임을 가진 박중양은 1906년(고종 43), 부산에서 고용한 인부 60명을 데리고 대구읍성을 해체하고자 조정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대구부의 성첩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 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광무 10년 10월 경상북도관찰사서리 대구군수 박중양.”
조선 정부에서 부랴부랴 성벽 철거 불허 훈시를 내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박중양은 준수한 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청일전쟁 무렵부터 일본인들과 자주 교제하였고, 7년 동안 관비로 일본에 유학하였다.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 제도와 감옥 제도를 연구한 박중양은 유학 시절부터 이미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일본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일본인들의 칭송을 받은 박중양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등한시한 채 얼마나 일본인의 편에서 일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구읍성을 무단으로 철거한 박중양에 대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징계를 검토하였다. 박중양에 대한 징계를 무마한 인물이 바로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박중양의 친일 행각은 『대한매일신보』의 「중양 타령」[1909. 1. 16.]에도 등장한다.
“중양가절 말 말아라. 전무후무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 구공해를 일시간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일제가 펴낸 ‘조선공훈자명감’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지사급에서는 박중양뿐이다”라고 등장할 정도로 출세한 친일파 관료 박중양이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대구읍성 철거가 일본에 가져다준 이득이 얼마나 컸는지 유추하여 볼 따름이다.
이듬해인 1907년(순종 1)에 대구역이 생기면서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자 대구읍성 밖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대구읍성 철거를 더욱 거세게 요구하였다. 일본인이 대구도로위원회를 결성하여, 무너뜨린 성벽 구간에 순환도로를 개설하자고 협의하였고, 일본인대구거류민회를 중심으로 대구읍성을 완전히 철거하기에 이른다. 토축 읍성이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지 315년 만에 일본인과 친일파가 대구읍성마저 파괴함으로써 대구 성벽의 역사는 일본으로 인한 비극을 면치 못하였다.
[사성로가 생겨난 배경]
대구읍성이 일본인의 경제적 침략에 의하여 철거된 이후 대구읍성 자리는 도시를 이룰 만한 뼈대만을 겨우 남기게 된다. 읍성이 허물어져도 성안의 주요 관공서가 남아 있었으므로, 성의 동서남북 문을 기준으로 성안의 각 주요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를 내었고 그 주변으로 자연스레 번화가가 구성된 것이다. 도로를 통하여 사람이 오가고 물건이 거래되었기에 읍성이 있던 자리에는 시가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대구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읍성 주변부는 주요 기반이 되었고 ‘대구 도시계획’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일본인과 친일파가 새로 난 길을 가장 많이 이용하게 되었고, 일본 상업자본은 대구읍성을 무너뜨린 중심지를 상업 경제 지구로 여기며 애용하였다.
성벽이 철거된 자리에는 지금의 동성로·남성로·서성로·북성로로 불리는 도심 순환도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1909년(순종 3)에는 급기야 성안에 열십자[十] 도로를 내는데, 이로 인하여 대구의 중심이던 경상감영의 객사가 철거되고 선화당 바로 앞으로 도로가 나는 등 조선 정부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유린하는 듯한 처사가 이어진다. 현재 남에서 북으로 난 길을 중앙로라 부르고 동에서 서로 난 길을 국채보상로라 부르고 있다.
그 후 십자로가 교차하는 네거리 주위에는 헌병대 본부, 경찰서, 농공은행, 우체국, 금융조합 등 식민 침탈의 근거지가 된 각종 건축물들이 자리를 잡아 갔으며, 일본인이 주도하는 식민지 금융자본과 대기업들이 들어서면서 상업·경제 침탈의 중심지가 되고 만다. 현재 대구읍성의 성문 및 소문이 있던 위치에 표지석이 세워져 옛 흔적을 기리고 있다.
남성로는 성안의 십자로 개통 이후 약령시가 열리면서 더욱 발달하게 된다. 현재 대구광역시의 최고 번화가로 일컫는 동성로는 1914년 당시 ‘동성정(東城町)’으로 불리다가, 1946년에 ‘동성로’로 바뀌었다. 대구역에 내려 청도와 밀양 등지로 이동하는 사람들 덕분에 금세 활성화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 이후 영화관, 백화점 등이 들어서면서 번화가로 부상하였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된 ‘동성로 공공 디자인 개선 사업’은 대구읍성의 역사성을 회복하고, 동성로에 도시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북쪽 성벽을 철거하고 낸 북성로가 원정통(元町通)으로 불리며, 일제강점기 대구 최대의 번화가가 되었다. 북성로에는 대구 최대의 백화점 미나카이 오복점, 조경회사 스기하라 합자회사, 스기하라 제림소, 목재 회사 쿠로가와, 목욕탕 조일탕, 철물점 등 일본인 상점과 회사들이 즐비하였고 식당, 요릿집, 여관, 영화관 등이 있었던 향촌동과 붙어 있어 대구 최고의 번화가로 꼽혔다.
북성로가 상업의 중심가라면 서쪽 성벽을 철거하고 낸 서성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조선인 거부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시인 이상화(李相和)의 부친인 이시우, 백부인 이일우 등이 살기도 하였다.
1917년에는 대구역에서 반월당까지 폭 12칸의 대형 신작로를 낸다. 중앙로를 따라서는 극장, 여관, 양복점, 잡화점 등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1966년에 한일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1969년에 대구백화점이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열면서 상권은 공평동 방향과 동아양봉원 방향, 중앙파출소 등 옛 읍성의 동쪽으로 뻗어 나가며 대구 상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새로운 도로와 함께 자연스레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번성하였던 ‘성내 십자로’는 1970년대 들어 이면도로로 전락하게 되고 지역 상권도 한때 명성에 비하여서는 크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성돌 모으기 운동]
대구읍성, 경상감영, 달성 토성을 묶어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대구광역시 중구청에서는 대구읍성의 흔적을 되찾기 위하여 2008년부터 옛 성돌을 수집하고 있다. 친일파 박중양과 함께 대구읍성 해체를 주도하던 일본거류민단이 철거한 읍성의 성돌을 어디에 주로 썼는지 떠올려 보면 성돌의 주요 위치는 금세 파악된다. 당시 일본거류민단은 이른바 역세권인 대구역 근처에 사 둔 도원동 일대 수만 평의 땅을 개발하는 데에 읍성의 토석을 이용하였다. 당시 도원동 땅은 2m가량 푹 꺼져 있었기에 매립이 필요하였다. 아울러 성돌 일부는 동산의료원 선교사 주택, 계산성당, 계성학교, 아담스관, 제일교회, 신명여고[현 신명고등학교] 등 당시 대구의 서양식 건물을 짓는 기초, 벽체, 축대 등에 사용되었다.
2013년에는 ‘대구읍성 성돌 모으기’의 결과서인 『대구읍성 성돌 실태조사서』를 발간하였다. 성돌 모으기 캠페인을 벌인 결과 가정집의 담장석과 석축, 정원석 등에서 대구읍성 성돌이 발견되었으며 대구광역시 중구의 계성학교, 동산동, 달성공원, 북성로, 대구향교, 남산동, 삼덕동 등 현장 조사를 통하여 3만 819개를 확인하였다.
2011년부터 대구광역시는 ‘대구읍성상징거리조성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서성네거리 북편에서 대구은행 북성로지점까지 도로에 대구읍성 성벽을 재현한 모양의 중앙분리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성로와 남성로는 길바닥에 성벽 길을 나타내는 돌을 깔았다.
또한 2014년 5월에 대구광역시 북성로 구간의 가로환경개선사업을 위한 바닥 굴착 작업 중에 성벽 흔적이 발견되었다. 2015년에 세종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한 결과, 성벽의 체성 지대석 일부가 확인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17년에 북성로 곳곳에 대구읍성 거리박물관을 조성하였다. 대우빌딩 인근과 꽃자리다방, 북성신협, 삼양베어링상사 앞 등 4곳에 만들어진 거리박물관은 인도 아래를 1m 정도 파내 성벽의 기저부 성돌 모형을 설치하고, 그 위에 미끄럼 방지 투명 강화유리를 덮어 전시물 위를 걸으며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05년 당시 주거지역과 성벽, 4대문을 표시한 읍성 모형과 성벽 축조 과정,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모형들을 전시하였으며, 내부에 LED 조명도 설치하여 야간에도 볼 수 있게 하였다.
‘대구읍성 기억하기 운동’을 통하여 대구읍성이 지닌 역사적 상징을 되새기고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시민사회로부터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