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2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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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履常 |
이칭/별칭 | 곽이상(郭履常),곽이후(郭履厚)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홍수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아버지는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1551~1597]이다.
[활동 사항]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곽준은 안음 현감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켰다. 당시 곽준의 상관이던 백사림(白士霖)은 산성을 둘로 나누어 험준한 북쪽은 자신이 지키고, 평지에 가까운 남쪽은 곽준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은 당연히 험준한 북쪽을 버리고 평지나 다름없는 남쪽부터 침공해 들어왔다. 왜군은 군사의 수와 무기에 있어 아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준은 전투가 시작되자 용감하게 왜병과 맞서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아군은 그날 밤 물러났던 왜병들의 돌연한 기습에 무너지고 말았다. 산성의 북쪽을 방어하고 있던 백사림이 왜군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자 그 빈 곳을 통해 다시 쳐들어온 것이었다. 적군의 수가 많은 데다 기습적인 공격이어서 곽준의 군대로는 막아 낼 수 없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곽준과 함께 싸우던 두 아들 곽이상(郭履常)과 곽이후(郭履厚)는 서둘러 피신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곽준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땅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굳은 결의를 알고 자신들도 왜구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급기야 왜구들이 가까지 쳐들어오자 두 아들은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자 곽준은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직책이 있으니 이곳을 죽음으로라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렇지 않으니 피신하도록 해라.”
하지만 두 아들 또한 아버지의 마음만큼이나 굳건하고 지극하였다. “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죽으려는 것은 어찌 아니 되겠습니까.”
곽이상 형제는 왜구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황석산성의 전투에서 곽씨 집안은 부자가 모두 순국하는 비극을 당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1598년(선조 31)에 정려(旌閭)를 하도록 명을 내리고, 곽이상 형제에게 정랑(正郞)을 추증하였다.
[상훈과 추모]
효자 곽이상 형제의 정려는 현풍 곽씨 문중의 다른 정려들과 함께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 1348-2번지에 위치한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에 봉안되어 있다.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은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곽이상 형제의 죽음을 애도한 「제이 곽이상 이후 문(祭二郭履常履厚文)」이 박성(朴惺)[1549~1606]의 『대암집(大菴集)』 권2에, 「증 정랑 곽공 이상 이후 쌍묘갈명(贈正郞郭公郭公履常履厚雙墓碣銘)」이 유명천(柳命天)[1633~1705]의 『퇴당집(退堂集)』 「문집(文集)」 권3에, 행적을 찬술한 「효자 증 정랑 이공 찬(孝子贈正郞二公贊)」이 곽종석(郭鍾錫)[1864~1919]의 『면우집(俛宇集)』 권144에 각각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