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261 |
---|---|
한자 | 郭宜昌 |
이칭/별칭 | 곽의창(郭宜昌),곽유창(郭愈昌)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홍수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아버지는 소계(蘇溪) 곽주(郭澍)[1569~1617]이다.
[활동 사항]
곽주의 둘째 아들 곽의창(郭宜昌)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효성을 보였다. 곽의창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이 들어 눕자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아버지를 문병하러 오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형제는 항상 아버님을 곁에서 모시고 있어 병환에 차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옵니다. 어르신께서 보시고 어떤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손님은 비록 어린아이의 말이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버지 또한 아들의 말에 가슴이 뭉클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어린애가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을 이렇게도 아프게 하느냐.”
그러자 곽의창은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장에서 떨어진 흙이 눈에 들어가서 눈물이 났을 뿐입니다.”
곽의창의 이런 마음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도 여전하였다. 곽의창은 부친의 상을 당하자 어른처럼 통곡하고, 조석으로 죽만 먹고 어머니가 좋은 음식을 만들어 주어도 먹지 않았다. 간혹 곽의창의 큰형인 곽이창(郭以昌)이 외출하면 혼자서 상식(上食)을 올리고, 조문객이 오면 영접해서 곡읍(哭泣)을 하였다.
곽의창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란 동생 곽유창(郭愈昌)도 효심이 지극하였다. 곽유창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너무 어린 나머지 곽유창은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곽유창은 여덟 살이 되자 형인 곽이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 상복을 입지 못해 천지간에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참최(斬衰)의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마치려 합니다.”
그러자 큰형은 눈물로 만류하였다. “너의 말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뒤늦게 상복을 입는 일은 선배 학자들도 나무란 일이니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말은 듣고서 곽유창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의 심정이 지극히 슬프기는 하나, 형님의 가르침과 선배 학자들의 나무람을 저버리면서까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 곽유창은 그 마음을 돌려 어머니를 모시는 데 정성을 쏟았다. 곽유창은 모친상을 당하자 장례를 모두 당시의 법도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식에 따랐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항상 빈소에서 거처하였다. 음식은 장례 전에는 메밀가루 한 홉을 물에 타서 마시고, 장례 후에는 나물밥 한 그릇을 구운 소금으로 먹는 것이 전부였다. 상을 마치는 날까지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다하고, 초상을 치르기 위해 상여가 집을 떠날 때는 그 줄을 잡고 30리 험준한 길을 따랐다. 하관(下棺)을 할 때는 통곡하는 소리와 가슴을 두드리며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비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본 일꾼들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봉분(封墳)을 조성하는 일은 딴 곳과는 다르니, 어찌 소홀히 하여 효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으리오.”
[상훈과 추모]
곽의창 형제가 세상을 떠난 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두 형제 모두에게 장원서 별검(掌苑署別檢)의 벼슬에 증직(贈職)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효자 곽의창 형제의 정려는 현풍 곽씨 문중의 다른 정려들과 함께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지리 1348-2번지에 위치한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에 봉안되어 있다. 현풍 곽씨 십이정려각은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효도와 우애가 남다르게 지극하였던 곽의창의 죽음을 애도한 「만 곽수재 의창(輓郭秀才宜昌)」이 박수춘(朴壽春)[1572~1652]의 『국담집(菊潭集)』 권1에, 형제의 행적을 찬술한 「효자 증 별검 이공 찬(孝子贈別檢二公贊)」이 곽종석(郭鍾錫)[1864~1919]의 『면우집(俛宇集)』 권144에 각각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