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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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姉 李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홍수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열녀.
[활동 사항]
순조(純祖) 말년,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에 이씨 낭자(李氏娘子)가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병중에 외출하여 어머니가 죽을 끓여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갔을 때 뜻밖에 집에 불이 났다. 겨우 열두 살 어린 나이의 이씨 낭자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자기 몸으로 젖먹이 남동생을 감싸서 살려 내었지만 정작 자신은 타 죽고 말았다. 이 고을 판관(判官)인 조종순(趙鍾淳)이 열두 살로 아직 계집아이 티를 벗지 못한 이씨 낭자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동생을 살리려는 의로운 마음에 죽었다는 사연을 전해 듣고 이씨 낭자를 추모하는 명(銘)을 지었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산 14-4 임야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씨 낭자를 기리는 의자 이랑지비(義姉李娘之碑)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산 14-4 임야에 있다. 훗날 이씨 낭자의 남동생이 자라서 비명에 간 누나를 잊지 못해 무덤 앞에 나무로 만든 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서 없어지자 고을 사람들이 현재의 비석을 세웠다고 전한다. 원래 의자 이랑지비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산 5-4 임야에 있었는데, 국가 지원 지방도 30호선[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를 거쳐 경상남도 창원시까지 연결됨] 확장 공사로 인해 2002년 5월 30일 이곳으로 묘지를 옮겨 쓰면서 함께 옮겨졌다.
의자 이랑지비는 높이 87㎝, 폭 34㎝, 두께 11㎝에 오석(烏石)으로 되어 있고, 비석의 위쪽 부분이 삼각형으로 뾰족한 규수(圭首) 형태이다. 앞면에는 ‘의자 이랑지비(義姉李娘之碑)’, 뒷면에는 ‘갑자년[1924] 3월 3일에 다시 세우다.[甲子三月三日重竪]’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측면에는 제152대 대구 판관(大邱判官) 조종순(趙鍾淳)[1824년 12월부터 1827년 12월까지 대구 판관을 지냄]이 지은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아우를 대신해서 죽었도다. 젖먹이 껴안고 의로운 마음 지켜서, 어버이를 위한 후사를 세웠구나.[甘羅其齡 代弟而死 聶嬰乃志, 爲親之嗣]’라는 명(銘)이 새겨져 있다.
1945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 무덤에 벌초를 하면 이씨 낭자의 혼령이 도와준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서로 몰래 벌초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묘지의 빗돌을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씨 낭자가 소원대로 해 준다고 하여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부터 가창면에서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