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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41
한자 道- 東- 道東 書院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35]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68년 - 쌍계 서원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73년 - 쌍계 서원으로 사액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4년 - 쌍계 서원에서 보로동 서원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7년 - 도동서원으로 재사액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0년 - 도동서원 사액 현판을 걸고, 김굉필 위패를 봉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77년 - 한강 정구를 종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21일 - 달성 도동서원 중정당, 사당, 담장 보물 제350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10월 5일 - 달성 도동서원 사적 제488호로 지정됨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지도보기

[정의]

조선 시대 도학의 중심지이자, 한국의 서원 건축을 대표하는 도동서원에 관한 이야기.

[개설]

2019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예정인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동방 오현(五賢)의 으뜸으로써 문묘에 배향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향사하는 서원이자,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이다. 1568년(선조 1) 김굉필의 고향인 현풍에 향중 사림들에 의해 건립한 쌍계 서원(雙溪書院)이 사액과 서적을 하사받은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실되자 1604년(선조 37) ‘보로(甫老)’로 개명하여 중건한 후 1607년(선조 40)에 재사액의 명을 받았으며, 1610년(광해군 2)에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를 지닌 ‘도동(道東)’으로 재사액 현판을 걸고, 위패 봉안식을 올렸다. 1678년(숙종 4)에는 서원 중건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추배하였다.

도동서원은 대구·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중부권을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향촌 문제 또는 사림들의 공동 관심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 원사 훼철 당시 제외됨으로써 서원 운영과 관련한 필사본과 고문서 등 소장 자료가 다른 서원과 비교하여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도동서원은 입지와 경관, 그리고 건축에서 한국 서원을 대표하는 곳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어서, 1963년 도동서원 강당과 사당 및 장원(牆垣)은 보물로, 2007년 10월에는 서원 전역이 사적로 지정되었다.

[근세 도학지종 한훤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

1. 근세 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굉필은 1472년(성종 3)에 합천군 야로현[현재의 가야면]에 사는 순천 박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결혼 후 김굉필은 처가 근처에 조그만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란 당호를 달았다. 한훤당의 ‘한훤(寒喧)’은 춥고 따뜻한 기후를 말하는 것으로 매일 부모님께 문후를 여쭙는 인사말을 뜻한다. 따라서 한훤당 당호는 일상생활에서 마땅한 도를 실천하자는 『소학(小學)』의 정신을 나타낸다. 그러나 더 생각해 보면, 외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희로애락과 사려 깊은 행동이 중용을 얻어야 정신과 몸을 함양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한훤당’으로 호를 정한 김굉필은 아마도 시대의 상황이 결코 자신의 길을 가는 데 부합하지 않지만, 일상에서 도를 실천하면서 따뜻한 덕성을 함양하여 중도를 얻고자 하는 생각을 함축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한 김굉필의 학문과 실천 자세는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는 제자들에 의해 높게 평가되었다. 그 결과 조선중종대[1506~1544]에 조광조를 비롯한 김굉필의 문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성균관 유생들은 1517년(중종 12)부터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와 한훤당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유생들은 이 상소문에서 정몽주를 유종(儒宗)이라 하고, 김굉필에게는 지금의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생각한다고 칭송하였다. 김굉필을 정몽주의 적통으로 조선 유학의 도통을 계승한 사람으로 평가한 것이다. 비록 당대에 김굉필의 문묘 종사가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선조가 즉위한 1568년 이후에도 김굉필의 문묘 종사 요청은 계속되었다. 이때부터는 김굉필을 가장 먼저 세우고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이른바 ‘동방 오현’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굉필은 오현 가운데 이름이 가장 먼저 올라 수현(首賢)으로 불리고, 퇴계는 김굉필을 ‘근세 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 하여 조선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였음을 암시하였다. 김굉필의 유학 사상사에서의 위치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앞장서 도학으로 인도한 인물[首倡道學]’이다. 퇴계는 정몽주에 이어 도학을 계승한 인물로 김굉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개 우리나라 선정(先正)들이 도학에 있어서 비록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도 일어난 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마침내 절의(節義) 사장(詞章) 장구(章句) 사이에 머물 뿐이었다. 오로지 위기(爲己)만을 일삼아 참다운 실천으로 공부를 삼은 이는 오직 한훤당 한 사람만이 그러하였다." 『퇴계집』권48,「정암 조 선생 행장(靜庵趙先生行狀)」

여기서 설명된 도학은 어려운 상황에서 절개를 지키거나, 시문을 짓거나, 경전을 외우거나 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 대신 일상생활에서 심성을 수양하고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도학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학은 훌륭한 시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행실 즉 위기의 학문에 오로지 마음을 모아 성인을 닮고자 하는 행실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그리하여 김굉필은 ‘앞장서 도학으로 인도한 인물’이며, ‘근세 도학지종’으로 불리고, 동방 오현 가운데 수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아래의 『선조실록(宣祖實錄)』 기사는 선조 때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면서 김굉필의 학문적 성취와 후세에 끼친 공로를 설명한 글이다.

“우리 동방이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문장 있는 선비들이 찬란하게 배출되었지만 의리(義理)의 학문은 실로 김굉필로부터 열렸던 것입니다. 김굉필이 우리 조선조의 초기의 학문이 끊어진 뒤에 태어나 처음으로 성현의 학문을 흠모하여 구습을 모두 버리고, 『소학』에 마음을 다하여 명성과 이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에 힘쓴 지 10여 년 만에 동정(動靜)이 모두 예법(禮法)을 따랐고 지경(持敬) 공부를 오로지한 지 30여 년에 정력이 쌓이고 도와 덕이 이루어져 말과 행동이 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난세를 만나게 되자 화를 피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으니, 세상에 시행한 것은 없었으나 그가 마음으로 체득한 것이 있음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 있습니다. 가르쳐 인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우리 동방의 선비들로 하여금 성현의 학문이 있음 알게 한 것은 실로 김굉필의 공입니다.” [『선조실록』 권4, 선조 3년 5월 병자(丙子)]

김굉필이 비록 도와 덕을 성취하였으나 난세를 만났기 때문에 체득한 바를 펼칠 수 없었고 오직 후진을 교육할 수 있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김굉필을 당시 지배적이었던 시문(詩文) 중심의 학문을 버리고, 정몽주 이후에 끊어진 의리의 학문을 다시 열었던 인물로 평가한 것이다. 이 의리 학문은 『소학』 공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김굉필의 공적으로는 후진들에게 성현의 학문을 가르친 것을 들고 있다. 『소학』은 주자가 성리학적 윤리의 일상화를 위해서 『예기(禮記)』,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20여 종의 책에서 발췌한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은 수신서(修身書)이다.

조선 초기부터 『소학』은 중시되었고, 국가의 성리학적 교화를 위한 기본서로서 정책적으로 여러 차례 간행되어 권장하였다. 현재에도 『소학』은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이자, 지식·경쟁 교육에 매몰된 현대 교육에 대안이 될 수 있는 훌륭한 고전이다. 『소학』의 인성론과 공부론은 인성 교육의 토대로서 근본을 함양하고, 지행(知行) 과정을 통해 전인 교육적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소학』은 김굉필 이래로 문인들과 이황을 비롯한 도학 실천을 중요시한 선비들에 의해서 그 가치와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조선 시대 내내 그러한 기조가 유지되었다. 실제, 김굉필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소학』을 배운 후 모든 학문의 입문서인 동시에 인간 교육의 절대적인 원리가 됨을 역설하며, 평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소학 동자’라 자칭하였는데, 김굉필이 지은 시에 『소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이제부터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구차스럽게 어찌 잘 살기를 부러워하리오”

이상에서 김굉필은 15세기 후반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후학 교육에 힘쓴 교육자이자, 조선 성리학 적통을 계승한 도학자로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굉필은 『소학』 교육의 보급과 조광조·김안국(金安國)으로 대표되는 중종 대 개혁 정치 주역들의 배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될 때 동방 오현 중 수현의 자리에 위치함으로서 조선 성리학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로 확정되었고,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 역시 도학적·역사적 위상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2. 김굉필의 사상을 도동서원에 구현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김굉필이 남긴 실천 도학을 도동서원에 구현한 한강 정구는 퇴계 이후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김굉필의 외증손자였다. 정구는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曺植)에게 사사했고, 퇴계와 남명학파의 학문을 통합하고자 힘썼다. 퇴계와 남명의 사후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열어 나가며, 다양한 분야의 저술과 많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특히, 정구의 경세론이 허목(許穆)을 통해 근기학파에 전해져 실학파 등의 경세(經世)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정구의 김굉필에 대한 계승 의식은 『연보』·『사우록』·『경현속록』 편찬, 성주 천곡 서원(川谷書院) 운영, 도동서원 중건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특히 도동서원 중건 과정에서 보여준 일련의 노력들 즉, 중건을 총괄하는 원장 자리에 문인 곽근(郭赾)을 선임하거나, 경제적 지원 마련을 위한 지방관 및 사림에게 협조 요청을 하고, 사액을 위한 경향(京鄕) 간의 가교 역할과 봉안문(奉安文) 찬술 및 퇴계 글씨를 집자한 현판 제작 등은 도동서원의 권위와 김굉필의 도학상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러한 노력은 서원의 건립은 성리학적 도통(道統) 의식에 근거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구는 도동서원 가까운 곳에 정자 낙고재(洛皐齋)를 짓고 거처하면서 도동서원의 설립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도동서원의 원규(院規)를 만들어서 서원 교육과 운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도동서원 원규」에는 어린아이를 비롯하여 20세 이하인 자들을 위해 별도의 양몽재(養蒙齋)를 두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인재 양성이 도동서원의 건립의 주요 목적 중 하나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구의 문집에 실려 있는 「도동서원 원규」의 주요 내용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향사를 근실하게 실행할 것[謹享祀]: 향교는 사실 근본이 되는 곳인데 요즘에는 의식이 해이해진 정도가 지나쳐 비록 식견이 있는 선비라 해도 스스로 세속에 휩쓸려 남의 집안일처럼 보고 있다. 앞으로 원임(院任)은 항상 정일(丁日)을 만나면 경내의 유생을 인솔하고 미리 한자리에 모여 석전(釋奠)을 행하고, 본원의 향사는 중정(中丁)에 행함으로써 유생 상호간에 일체감을 갖게 하고 선현에 대한 향사가 선후의 순서가 있도록 해야 한다. 향사에 일곱 번까지 불참한 자는 명단에서 축출한다.

2) 원장을 존중할 것[尊院長]: 원장의 직임은 자주 섣불리 바꿔서는 안 된다. 부득이한 연고가 있어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스스로 그 사유를 글로 갖추어 원중(院中)에 고한다.

3) 유사를 가려 정한다[擇有司]: 원장과 원중이 함께 논의하여 고르되 반드시 순박하고 신중하고 치밀한 사람을 골라 맡긴다.

4) 신진을 영입한다[引新進]: 언제나 향사하는 날 신진을 논의하여 영입한다. 천거하여 올리는 대상은 반드시 20세 이상으로서 훌륭한 학행이 있는 자로 한다. 또 비록 약관이 채 안 되었더라도 사마시에 입격하거나 혹은 향시에 합격하고 재주와 행실에 뛰어나 유익한 벗의 반열에 끼일 만한 자로 한다. 새로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를 비롯하여 20세 이하인 자들은 모두 양몽재(養蒙齋)에 입학하는 것을 허용한다. 비록 20세가 지났더라도 미처 원유 선발에 들어오지 못해 양몽재에 들어가길 원하는 자 또한 그 요구를 들어 준다.[양몽재는 서재 앞 담 밖에 있었다]

5) 앉는 순서를 정한다[定座次]: 앉을 때는 반드시 나이 순서대로 한다. 만약 벼슬이 높은 자가 있거나 혹은 다른 지방의 손님이 있을 때는 모두 차례를 정해 앉는다. 양몽재의 학생은 모두 남쪽에 앉는다.

6) 강습을 부지런히 한다[勤講習]: 원장은 벗들을 불러들여 학문을 권하고, 강습하는 것을 폐하지 않는다. 겨울과 봄에는 오경(五經)과 사서(四書) 및 이락(伊洛)의 여러 성리서를 읽고, 여름과 가을에는 역사서, 자서(子書), 문집을 대상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읽도록 한다. 본 서원에 들어온 선비는 과거 시험을 대비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과거 시험 이외에도 옛 사람의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것이 있다. 타고난 본성 속에서 위기지학을 찾는다면 마음을 두어야 할 곳과 힘을 들여야 할 길은 아마도 '경(敬)' 한 자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훤당께서 평생 절실히 추구한 것은 다 이 '경(敬)' 자였다. 조정의 이해, 변방의 소식, 관원의 임명, 고을 관원의 장단과 득실, 뭇사람들이 저지른 죄악 등에 관해서는 모두 언급하면 안 된다. 음담패설 등 여색에 관한 부정한 말이나 음식물을 요구하는 부끄러운 일은 해서는 안 된다. 양몽재 여러 학생에 대하여는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이 깊은 뒤에 잠자리에 들어 『소학』을 읽을 것을 명하되, 그 과정을 엄하게 세워 가차 없이 훈계한다. 읍하고 절하는 것이 법도가 있고 말씨가 겸손하여야만 배움의 길로 들어선 초기에 예의를 잘 익혀 진취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7) 어진 선비를 예우한다[禮賢士]: 은거한 현인이나 성인의 도를 좋아하고 지조를 지키는 선비가 어찌 없겠는가. 원장은 마땅히 학우들을 거느리고 예로써 그를 영접하여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8) 금지와 예방을 엄격히 한다[嚴禁防]: 『장자(莊子)』, 『열자(列子)』, 『노자(老子)』, 불교의 서책과 바둑판이나 장기판 같은 놀이 기구는 모두 서원으로 들여오지 못하게 한다. 일체 색깔이 다른 사람들[무사나 잡술을 익힌 사람]은 모두 출입하지 못한다.

9) 청작(淸酌)[제사에 쓰이는 술] 이외에 다른 술을 빚지 못한다. 윤제(尹祭)[제사에 쓰이는 육포] 이외에 소를 죽이지 못한다. 여종을 제당(齊堂)에 출입하여 밥상을 들고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한국 서원 건축을 대표하는 도동서원]

1. 밝은 달이 차가운 강물을 비춘다 : 천인합일(天人合一)을 표현한 도동서원

정구는 대니산(戴尼山) 아래에 도동서원을 창설하면서 선비들이 도동(道東)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고 유교 도학의 전통을 이어갈 방도를 생각했다. 정구는 후학들의 도동의 의미 체득과 전통 전승을 위하여, 서원의 입지·원규·제향·건물 배치 그리고 각종 석물(石物)과 건축의 디테일까지 기획하였다. 김굉필이 일상에서 실천한 도덕과 출처 의리를 후대 선비들이 체득하여 따라야 할 임무가 중하고, 가야 할 길은 멀다는 것을 알고 그 뜻을 담아 김굉필의 은거지인 도동리도동서원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정구는 외증조할아버지 되는 김굉필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재현할 수 있는 터를 찾고, 서원 건물의 공간 배치와 서원의 규모와 제도를 결정하였다. 「도동서원에 한훤당 김 선생을 봉안하는 글」에서 서원의 새 입지 선택의 기준을, 첫째, 대니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동강을 안대(案對) 경관으로 전망하는 것, 둘째, 보다 조용한 환경, 셋째, 김굉필의 연고지와 가까운 점 등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대니숭숭청락운운(戴尼崇崇淸洛沄沄)[대니산 높디높고 낙동강은 넘실넘실]

중유정려묘모유존(中有精廬廟貌攸尊)[그 가운데 서원 사당 모습 엄숙하네]

석일쌍계성시추훤(昔日雙溪城市湫喧)[전의 쌍계 터는 시끄러운 저잣거리]

자언이복밀이구원(玆焉移卜密邇丘園)[여기 옮긴 자리는 은거지와 가깝다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건축물 배치로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뒤로는 대니산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 조건에 동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형식이다. 이는 주변의 산수 및 지형지세를 고려하여 굳이 남향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서원은 전면으로 평야와 백사장 그리고 낙동강이 흐르는, 시원하고 넓게 열려 있는 지형을 갖춘 곳이다.

도동서원의 전망 경치를 보기 위해 건립한 누각이 문루(門樓) 수월루(水月樓)이다. 도동서원은 경사가 급한 산기슭에 지어졌으므로 굳이 이층 누각이 없어도 전망 경치를 즐길 수 있었기에, 1846년(헌종 15)에 수월루가 건립되기 전까지는 누각이 없었다. 한편, 수월루가 1849년(헌종 15)에 창건된 후 1863년(철종 14)에 한 차례 중수가 있었고, 1888년(고종 25)에 불타 없어진 후 1973년에 재차 중건되기까지 약 100년의 공백이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수월루가 19세기에 처음 건립되었을 당시의 수월루와는 많이 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의 수월루는 서원 내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조망을 방해하고 전체 건물과의 조화를 다소 훼손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건립할 당시에는 아마도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컸을 것으로 짐작되기에 현재와 같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월루라는 명칭에서 ‘수월(水月)’은 도동서원의 전망 경관 해석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는 일종의 텍스트이며, 도동서원 전망 경치의 의미는 ‘수월’에 대한 해석으로 풀어볼 수 있다.

1849년(헌종 15)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지은 「수월루 상량문」에는 서원 밖 경치를 감상하며 궁극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량문에서 수월은 ‘차가운 강을 비추는 달[寒水照月]’의 의미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즉 “도동서원의 강의는 서원 앞 차가운 강물에 비치는 달처럼 밝게 빛나고, 안개 낀 달밤에는 작은 배를 타고 노닐며 무이도가(武夷悼歌)를 부를 수 있으니, 우리 마음은 밝고 차가운 정자를 비추는 달과도 신령스럽게 통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차가운 물에 비추는 밝은 달은 도동서원 선비들에게 천리(天理)를 밝혀주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은 이 천리를 자기 마음에 담을 것을 기약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차가운 강을 비추는 달’로 그려진 물과 달의 이미지는 도동서원이 제향하는 김굉필의 시문에 많이 보인다. 「회포를 씀(書懷)」은 청나라에까지 명성이 전해져 왕사정(王士禎)의 『지북우담(池北偶談)』의 「조선채풍록(朝鮮采風錄)」조에 실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명시로 알려졌다. 이 시에서 김굉필은 밝은 달이 비춰주는 외롭고 찬[孤寒] 사람으로 자신을 그렸다. 번잡한 세상사에서는 외롭고 어렵지만, 아지랑이 낀 강과 산과 겹겹의 산이 있어 자신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데서 외로울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서회(書懷)[회포를 씀]

처독거한절왕환(處獨居閒絶往還)[홀로 한가롭게 사니 오가는 이 없고]

지호명월조고한(只呼明月照孤寒)[다만 밝은 달 불러 외롭고 찬 사람을 비추려네]

번군막문생애사(煩君莫問生涯事)[그대여 번거로이 내 생애 묻지 말게]

수경연파수첩산(數頃烟派數疊山)[아지랑이 낀 두어 가닥 물결과 겹겹 산 뿐이니]

2. 엄숙 정제한 유교적 예(禮)의 실현 공간

도동서원은 조선 시대 서원 건축 공간의 전형성이 가장 우수하게 표현된 서원으로 평가된다. 한국 서원 건축 공간의 기본 배치는 강학 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 공간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이다. 규모를 갖춘 서원은 문루로 대표되는 유식(遊息) 공간을 서원 진입 부분에 추가한다. 한국 서원 건축의 전학후묘 배치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前底後高)의 지형을 활용한 것이다. 높은 위계의 건축물이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입지하는 것이 위계적으로 높은 권위를 상징한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학후묘의 공간 배치는 전후 상하를 꿰뚫는 종적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적 건물 배치로 완성된다.

이러한 공간 배치가 엄숙 정제(嚴肅整齊)라는 유교적 예를 상징적으로 실현한 것이며, 엄숙 정제한 서원 건축의 전형은 도동서원이 가장 우수하게 표현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실제 도동서원은 경사지라는 지형 조건을 활용하여 수많은 축대를 쌓아 층위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수월루로 대표되는 유식 공간, 강당과 동재·서재로 구성된 강학 공간, 사당이 자리한 제향 공간이 위계에 따라 ‘전저후고’ 지형 위에 축선을 중심으로 누각 - 중문 - 강당 - 내삼문 - 사우 건물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건물을 ‘전저후고’로 배치한 것으로 도동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도동서원은 이 건물들을 정연한 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다시 배치하였다. 좌우 대칭 배치의 정연함은 도동서원 건물이 모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서 더 강조된다. 한참 후대에 세워진 문루 수월루만이 팔작지붕으로 예외이다. 도동서원의 엄숙 정제는 경사 지형을 돌 축대로 분절하고, 축선을 기준으로 맞배지붕 건물을 좌우 대칭으로 정연하게 배치한 큰 그림으로 나타났다. '예(禮)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며,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라는 주자의 말처럼, 절도 있게 위계적으로 분절된 의례 장소가 도동서원의 건축 공간에 실현된 것이다. 도동서원 이건과 설립을 주재한 정구가 사당을 세우고 고한 봉안문에서 “새로 세운 사당 그 기상 엄숙하다”라고 한 것은 도동서원의 엄숙 정제한 공간 배치 구상을 밝힌 것이다.

수월루 아래 외삼문을 지나 돌계단 위에 서원 중문에 해당하는 환주문(喚主門)을 만난다. 계단에서 올려다보면 담장이 강학 공간을 모두 막아서고, 환주문 좁은 문 안으로 도동서원과 강당 중정당 현판만이 부각된다. 바로 한국 전통 건축의 차경 기법이다. 문 이름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는 의미가 깃든 이유가 충분하다. 서원의 중심 공간인 강학 공간 현판에 도동서원의 특성과 교학 정신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강당 중정당(中正堂)에는 중과 정을 표상하고, 동재 거인재(居仁齋)와 서재 거의재(居義齋)에서 인과 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서 온갖 일은 안정시키고 고요함을 위주로 사람의 표준을 세우셨다”라는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에서 나온 것이다.

중정당 전면과 안쪽 정면에는 도동서원 현판 두 개가 걸려 있다. 전면의 서원 현판은 이황의 글씨를 모각한 현판으로, 그 아래 ‘도동서원 액판 밑에 쓰다’라는 제목의 작은 현판이 달려 있는데 정구가 이황의 글씨를 모각하여 이 현판을 달게 된 연유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서원에 들어오는 우리 선비들은 이 편액을 우러러보고 어찌 서로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며, 도동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여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우리 학문의 전통이 끊이지 않을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자의 도가 동쪽 우리나라로 와서 수백 년 끊어졌으나 김굉필 선생이 이었으니,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의 이름은 무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쪽 정면에 걸린 사액 현판은 경상도 도사 배대유(裵大維)의 글씨이며, 강당 이름인 중정당 현판은 봉조하 이관징(李觀徵)의 글씨이다. 강당 벽면에는 특전을 주는 것을 허용하라는 숙왕의 전교를 등서한 ‘전교(傳敎)’를 비롯하여 경상 감사 김안국이 현풍의 학자들에게는 김굉필의 학문을 세상에서 으뜸으로 추존한다는 내용을 적은 ‘김안국 시판(金安國詩板)’과 ‘백록동규(白鹿洞規)’, ‘국기(國忌)’, ‘서원 규목(書院規目)’ 등이 걸려 있다. 중정단 기단은 아래쪽 지대석(地臺石)과 가운데 면석(面石), 위쪽에 얇게 포개진 갑석(甲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석들은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을 서로 물리도록 다듬어 쌓았다.

갑석 아랫단 면석 사이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네 개가 돌출해 있다. 네 마리 용머리는 좌우측 계단 사이에 둘, 좌우측 계단 바깥쪽으로 각각 하나씩 있는데, 계단 사이의 것은 물고기를, 계단 바깥쪽의 것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는 서원 앞 낙동강 물이 범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비보책을 상징하는 것이다. 석축에는 세호(細虎)라 불리는 다람쥐 모양의 조각을 추가했다. 동쪽 세호는 올라가는 모습으로 꽃 한송이와 함께, 서쪽 세호는 내려가는 모습으로 역시 꽃 한송이가 함께 조각되어 있다. 이는 의례 장소 출입에 오르고 내리는 동입서출(東入西出)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고, 좌우의 꽃을 해와 달로 읽어서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당에는 김굉필의 위패를 중앙에 모시고, 정구의 위패는 좌측에 배향하고 있다. 사당 내 특별한 것은 벽면 좌우의 그림이다. 좌측에는 달이 뜬 강변 풍경과 강에 작은 배를 그리고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라고 써넣었다. 우측에는 큰 소나무와 보름달을 그리고 ‘설로장송(泄露長松)’이란 문구를 써 놓았다. 보물로 지정된 사당 주변의 담장은 진흙에 기와를 박아 쌓아 올린 다음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되풀이하다가 기와지붕을 덮어 마무리한 아름다운 흙벽 담장이다. 사당 서편 담에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제문을 태우기 위해 작은 구덩이 같이 생긴 감(坎)을 설치해 놓았다.

[도동서원의 현대적 활용]

오늘날에도 도동서원 중정당 마루에 좌정하면 김굉필이 잠든 대니산은 높디높고, 밝은 달이 비춰주는 낙동강 물은 서늘하고도 도도하다. 엄숙 정제한 서원의 건물들을 바라보면 밖을 제어함으로써 마음을 기른다는 뜻을 깨달을 것 같다. 석축으로 이뤄진 서원을 올곧은 외길로 올라오는 방문객들도 이 자리에 앉으면 조선 유학의 종장을 모신 서원임을 알 것이다. 높은 석축 위에 앉은 중정당이 엄숙 정제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백 층 돌계단, 갖가지 색깔의 조각보 같은 중정당 기단, 거북 머리, 용 머리, 세호, 양 머리 조각들은 도동서원의 엄숙 정제한 예(禮)를 완성하기 위한 조화의 결정임을 느낄 수 있다.

다람재에 올라 강을 바라보면 정구가 서원을 세우고 올린 첫 향사문에서 “선생의 묘소와 서원이 가까우니 선생의 의표(儀表)를 뵙는 것처럼 황홀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조선 선비들이 ‘근세 도학지종’·‘소학 동자’로 추앙해 온 김굉필 선생의 정신세계가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동서원은 우리의 전통 정신문화를 대변하는 장소로서 잘 보존 관리되어 왔다. 또한 동방 오현의 수현인 김굉필을 제향하는 사액 서원으로서 한국 서원을 대표할 만한 권위와 규모를 갖추고 있다.

사액(賜額)은 명현(名賢)을 제향한 서원의 격을 한층 높여주는 기능을 한다. 사액의 의미는 국가에서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을 공식 인정하여 해당 서원의 액호(額號)를 지정, 판각하여 내려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서원의 여러 의례들 중에서도 사액례(賜額禮)는 가장 중요한 의례 중 하나였지만, 한 차례만 거행되었기에 건립 이래로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에 그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도동서원의 사액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재사액이라는 점과 실제 현판이 선사(宣賜)되지 않고 지방에서 판각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서원과는 다르게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사액 의례 재현은 아직까지 다른 서원의 선례가 없다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사라진 전통 의례를 복원하고 한국 무형 문화유산을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즉 도동서원 사액 의례 재현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다양성을 밝히고, 나아가 달성군과 도동서원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서 달성 문화 재단에서는 2013년 9월 달성 도동서원제를 개최하면서 전국 최초로 사액 봉행 행렬 및 영접·게액 재현 행사를 위시하여 충효 깃발제, 서원 스토리텔링전, 유생 체험 등의 부대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2013년 이후 달성 도동서원제가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달성군의 대표 축제인 비슬산 참꽃 문화제 내 문화 행사의 하나로 개최할 방안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화 사업은 서원의 전통 문화를 현대적 의미로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새로운 문화·관광 콘텐츠로 발굴한 좋은 사례이기에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모습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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