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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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周鎭 |
영어공식명칭 | Choe Jujin |
이칭/별칭 | 공보(公普),동계(東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출생 시기/일시 | 1724년 5월 14일 - 최주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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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63년 6월 16일 - 최주진 사망 |
출생지 | 최주진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
묘소|단소 | 최주진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출신 선비.
[가계]
최주진(崔周鎭)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공보(公普), 호는 동계(東溪)이다. 최주진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 최수학(崔壽學)은 광양현감(光陽縣監)을 지냈고, 할아버지 최정석(崔鼎錫)은 통덕랑(通德郞)이며, 아버지 최흥원(崔興遠)은 호가 백불암(百弗庵)인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익찬(翊贊)이 되었다. 어머니는 절도사 손명대(孫命大)의 딸인 일직손씨(一直孫氏)이다. 부인은 류영(柳泳)의 딸인 풍산유씨(豊山柳氏)인데, 슬하에 아들 최식(崔湜)과 이종우(李宗愚), 박한탁(朴漢倬), 김창운(金昌運), 손응로(孫應魯), 김천진(金川進)에게 출가한 다섯 딸이 있다.
[활동 사항]
최주진은 모습이 명석하고 눈동자가 해맑았으며, 6~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가끔 고법(古法)을 본받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자신의 문인 가운데 가장 기대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평소에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의리(義理)에 따라 나왔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군자유(君子儒)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하여 한결같이 어버이에게 순종하였다. ‘경(敬)’ 한 글자를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잃지 않아서 행동이 정성스러웠다. 나이 마흔 살에 사망하니 스승 이상정(李象靖)이 애통해 하며 “이 사람[최주진]의 불행이 사문(斯文)의 불행이다(斯人之不幸 乃斯文之不幸也).”라고 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주진은 성현의 말씀을 좋아하여 사서(四書)와 『심경』, 『근사록』, 『주자서절요』 등에 더욱 마음을 쏟아서 읽고 그 뜻을 두루 관통하였다. 『서경』의 「기삼백(朞三百)」에 이르러서는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문장을 해석하는 솜씨가 노숙하였다. 대산 문하에서 배우면서 당대에 저명한 이종수(李宗洙), 김종덕(金宗德), 이천경(李天慶), 정충필(鄭忠弼)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저서로 『동계문집(東溪文集)』 4권 2책이 있는데, 잡저 가운데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존양성찰(存養省察)’, 『대학』에 대한 견해 등을 수록한 「잡록(雜錄)」, 『소학』에 대한 의문점을 판별한 「소학지의(小學識疑)」, 「기삼백(朞三百)」에 대한 견해를 밝힌 「기삼백추보(朞三百推步)」 등이 주목된다.
[묘소]
최주진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해북촌 직지동(直枝洞)[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에 있는데, 묘지(墓誌)는 최시교(崔峕敎)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