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290 |
---|---|
한자 | 古代[東區]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주보돈 |
[정의]
초기 철기 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역사.
[개설]
서기전 2세기 무렵부터 한반도 남부 지역 전반에 나타난 현상과 마찬가지로 대구지역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기존 고인돌문화를 대체해 가는 현상이 벌어졌다. 고인돌과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나무로 짠 널무덤을 바탕으로 삼은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흑도장경호[검은간토기]나 삼각형점토대토기 등 새로운 토기문화와 함께 청동제의 의기(儀器)가 등장하였다. 서기전 1세기 무렵 주머니호나 조합우각형파수부호 등의 주요한 토기문화에서 철검, 철모, 철부 등 철제 농공구와 함께 위세품으로서의 한경(漢鏡) 및 방제경(倣製鏡), 그리고 동검(銅劍)·동과(銅戈)·동모(銅鉾)를 기반으로 삼은 문화로 발전하여 가는 양상을 보였다. 이제 한반도 남부 지역도 본격적인 철기문화 단계로 진입하였다.
이런 문화 변동은 당시 대동강 유역에 자리해 한반도의 가장 선진지로 기능하던 서기전 2세기 초 고조선(古朝鮮) 및 서기전 2세기 말엽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멸망으로 생겨난 유이민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대구분지 전반에 걸쳐 문화변동이 일어났으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천동, 효목동 등지에서 확인된 목관묘 계통의 유적은 그런 양상을 보여준다.
목관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대구분지 일대에는 커다란 정치 사회적 변동이 진행되었다. 기존 지석묘 문화와 결합하거나 또는 그를 대체해가면서 한층 더 큰 규모의 읍락이 곳곳에서 출현하였다. 이들 읍락들은 성장 도정에서 각자 생존을 위해 결속을 도모함으로써 한층 더 큰 정치체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로서 출현한 것이 초기국가로서의 읍락국가였다. 대구분지에서는 달구벌(達句伐)이란 이름의 국가가, 인근의 경산 일원에는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국(押梁國)이란 이름의 국가가 출현하였다. 당시 동구 지역의 향방은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금호강의 남안 일대는 지리적으로 보아 달구벌에 속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북안은 분명하지 않은 상태이다.
6세기 대구분지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良州)의 수창군(壽昌郡) 조에는 동구와 관련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같은 시기 경산의 실태를 전하는 장산군(獐山郡) 조에는 해안현(解顔縣)이 보여 주목된다. 해안현은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 혹은 미리현(美里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인 8세기 중엽 그처럼 고쳤다고 한다. 이 지명은 고려시대는 물론 이후 최근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어 왔다. 해안현이 8세기 경산군에 속하였지만 읍락국가가 출현하던 단계에도 역시 그러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장산군의 군치(郡治)가 있던 임당동 일대와는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리가 10km 이상 떨어진 사실을 고려하면 별개의 정치권에 소속하였다고 봄이 적절하다. 금호강변에 위치한 봉무토성(鳳舞土城)과 함께 동구의 각지에 산재한 고총고분(高塚古墳)은 그를 방증해 주는 자료이다.
동구에는 5세기를 중심 연대로 하는 고총고분이 비교적 많은 지역에 걸쳐 존재한다. 이를테면 불로동(不老洞)과 봉무동을 비롯해서 도동(道洞), 용수동(龍水洞), 미대동(美垈洞), 지묘동(智妙洞), 둔산동(屯山洞), 동내동, 괴전동(槐田洞), 진인동(眞仁洞) 등을 대충 손꼽을 수 있다. 특히 불로동과 봉무동은 대규모 고총고분이 밀집된 지역으로서 경산의 어떤 고분군보다도 크고 또한 그 수가 많다. 이는 인구 밀집 정도나 경제력이 그만큼 높았음을 뜻한다. 고총고분이 조영되기 이전 단계인 독립 세력이었을 당시의 정치력이 만만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현재 기록의 미비로 비록 국명을 잘 알 수 없는 형편이지만 아마 동구에도 독자적인 읍락국가가 존재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다가 4세기 전후 무렵 달구벌이나 압독국에 병합된 것으로 봄이 적절하다. 이어서 경주의 사로국(斯盧國) 중심의 신라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불로동·봉무동 일대에 발굴된 도로 및 생활 유적과 함께 고총고분군은 신라 영역으로 편입된 뒤의 실상을 보여 준다.
신라는 7세기 후반 왕도였던 금성(金城)을 벗어나 달구벌로 천도하려고 기도하였다. 달구벌이 새로운 왕도의 대상으로 선정되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를 추정할 만한 근거로는 달성(達城) 및 달구벌, 압독[압량]이란 지명과 함께 팔공산을 손꼽을 수 있다. 이들 모두가 신라의 지배세력인 김(金)씨 족단이 조상신으로서 섬기고 있던 닭을 뜻함은 크게 주목되는 사실이다. 신라가 국명을 일명 계림(鷄林)이라 부르기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명의 공통성은 이들 지역이 모두 서로 상당한 친연성(親緣性)과 함께 문화적 기반을 공유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 팔공산을 공산(公山), 중악(中岳), 부악(父岳) 등으로 불린 것은 그를 보증해 주는 사실이다. 비록 달구벌 천도는 귀족들의 완강한 발발로 실행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팔공산 일대가 통일신라를 통해 일종의 지방 불교의 성지처럼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도 그와 뚜렷한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신라 헌덕왕(憲德王)의 왕자 심지(心地)가 창건하였다는 동화사(桐華寺)를 비롯하여 갓바위, 부인사(符印寺) 등 중악[공산] 일대의 유명 사찰과 수많은 불사(佛事)의 흔적들은 그를 웅변해 주고 있다. 10세기 초 후삼국 정립기에 고려군과 후백제 사이에 이른바 공산전투[동수싸움(桐藪싸움)]이 벌어진 것도 이 일대가 물론 금성으로 들어가는 교통사의 요지인 데서 비롯한 일이지만 그만큼 장차 명운을 결정할 만큼 정치적·사상적[불교계]으로 중요시된 비중이 매우 큰 지역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