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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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東門市場 |
이칭/별칭 | 남문밖시장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전통시장.
[개설]
대구 동문시장(大邱東門市場)은 조선 후기와 개항기, 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재래시장이다. 조선 후기 대구에는 서시(西市)와 동시(東市)라는 두 개의 큰 시장이 있었다. 동시는 동문시장의 줄임말로 4일과 9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 따르면, 서문시장을 읍시(邑市)라 하고, 동문시장을 신시(新市)라 불렀다.
[변천]
동문시장은 대구의 새 시장으로 불리던 동시가 1791년(정조 15)에 동문 방면으로 이설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대구부읍지』에 따르면 대구의 신장(新場)은 1911년에 남문 방면에서 동문 방면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동문시장은 대구의 신장 또는 동시로 불리던 시장이 남문 방면에서 동문 방면으로 옮겨 가 개설되었다. 그 뒤 일제가 병영 도로를 확장하게 되면서 동문시장은 1917년 8월과 1919년 7월 두 번에 걸쳐 읍성의 남문 터를 낀 덕산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2,000평[약 6,612㎡]의 규모로 커졌다.
동문시장의 상거래가 확대되면서 시장 상인이 도로에까지 나와 장사를 하게 되자 도로가 시장이 되었다. 이에 덕산동에 자리 잡은 동문시장은 1929년부터 대구부의 정책에 따라 이전 개축이 추진되었다.
대구부는 1932년 10월 일본 대장성 예금부에서 저리 자금 6만 5000원을 빌려 남산동에 2만 2750평[약 7만 5207㎡]의 토지를 사들여 동문시장을 이전할 것이라 발표하였다. 또 덕산동에서 남산동까지 폭 20m의 도로를 개설할 계획도 함께 발표하였다. 이 도로는 중앙통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동문시장은 1937년 4월에 남산동 일대 2만 3195평[7만 6678㎡]의 규모로 시장을 건설하여 옮기게 되었다. 동문시장은 이전 규모의 10배 이상으로 커졌다. 대구부와 부회는 남산동으로 이전한 동문시장의 이름을 남문시장으로 변경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문시장은 1910년 3월 10일과 3월 30일 두 차례의 3·1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였다. 1919년 3월 10일 만세 독립운동은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이은 제2차 만세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3월 30일 만세 독립운동은 동화사(桐華寺) 지방학림(地方學林)의 승려들이 일으킨 3·1운동이었다. 또한 3월 10일 동문시장 만세시위를 일으킨 학생 일부는 일반 대중과 협력하여 비밀결사 혜성단(惠星團)을 조직하여 상인들을 대상으로 철시 투쟁과 일본 화폐 사용 금지를 요청하는 투쟁을 펼쳤다. 동문시장은 1930년 8월 일제의 합병 기념일을 성토하는 격문 투쟁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의 현장인 대구 동문시장은 대구의 서문시장과 함께 대구 2대 시장으로서의 전통과 위상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