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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133
한자 崔文植
영어공식명칭 Choi Moons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연표보기 - 최문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3년 - 최문식 숭실전문학교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2월 4일 - 최문식 평양학생기독교청년연합회 위원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7월 14일 - 최문식 조선청년동맹 평남연합회 집행위원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9월 - 최문식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 최문식 경북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 최문식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최문식 10월항쟁으로 징역 3년형 언도
거주|이주지 평양 - 북한 평양직할시
학교|수학지 숭실전문학교 - 북한 평양직할시
활동지 평양 - 북한 평양직할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최문식(崔文植)[1905~?]은 1905년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고 10월항쟁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최문식은 1923년 11월 6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예비과 재학 중 무정부주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7년 12월 1일 평양독서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2월 4일 평양학생기독교청년연합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12월 신간회 평양지회에 가입하여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1929년에는 선전교육부장을 맡았다. 1930년 7월 5일 ‘평양기자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최문식은 평양청년동맹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30년 7월 14일 조선청년동맹 평남연합회 설립대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최문식은 1932년 9월 산업별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할 목적으로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합정리부와 종교부를 담당하였다. 대구노동자협의회이재복·조홍기·김병창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혁명적 대중운동 결사체였다. 최문식은 1944년 과수원을 경영하다가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에 참여하였고,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선인민당 대구지부 간부를 역임하였으며, 1945년 10월에는 경북도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좌익계의 연합전선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경상북도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최문식은 1946년 10월항쟁으로 인하여 제5관구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이후 10월항쟁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최문식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석방되었지만, 마포형무소 복역 당시 전향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북한 당국에 끌려 다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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