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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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壽煥 |
영어공식명칭 | Kim Suhwan |
이칭/별칭 | 스테파노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정의]
대구 출신의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
[개설]
김수환(金壽煥)[1922~2009] 추기경은 음력 1922년 5월 8일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수환의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할아버지 김보현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천주교 신자였다. 김수환은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은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에서 지냈으며 1929년 군위공립보통학교[현 군위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가족들이 대구로 이사하여 성유스티노신학교로 전학하여 1935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도병에 징집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김수환 추기경은 1950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56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51년 9월 15일 대구교구 사제로 서품되어 경북 안동 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대구교구장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장, 1955년 경상북도 김천본당 주임신부, 김천 성의중고등학교 교장, 대구교구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하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1969년 4월 30일 로마교구의 산 펠리체 다 칸탈리체 첸토첼레 성당에서 명의(名義) 추기경으로 서임식을 가졌다. 1970~1975년[1차], 1981~1987년[2차]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1970~1973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1975~1998년 평양교구장 서리, 1998년 아시아 주교회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9년 서울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생명 존중과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시기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규명과 호헌 철폐를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던 학생과 시민들을 강제로 연행하기 위하여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시위 진입을 막은 사실은 유명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8개월간의 투병 끝에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경 향년 86세로 선종하였다.
[사상과 저술]
김수환 추기경 관련 저술로는 『이 땅에 평화를-김수환 추기경과의 대화』[햇빛출판사, 1988],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김수환 추기경의 세상 사는 이야기』[사람과사람, 1998],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천주교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1998],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신치구, 사람과사람, 1999],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신치구, 사람과사람, 1999], 『김수환 추기경 전집』[가톨릭출판사, 2001],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등이 있다.
[묘소]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천주교용인공원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수환 추기경은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제13회 심산상과 제2회 인제인성대상, 2001년 독일 대십자공로훈장, 2002년 칠레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대십자훈장 등을 받았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10주년을 맞는 2019년 2월에 추모 사진전과 유품 전시회, 기념 음악회 등 추모행사를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