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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036
한자 崔允東
영어공식명칭 Choi Yoondong
이칭/별칭 최진(崔震)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7월 3일연표보기 - 최윤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최윤동 대동청년단 가입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최윤동 윈난무관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 최윤동 중국에서 서로군정서 군무국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0월 - 최윤동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월 - 최윤동 대구청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1월 2일 - 최윤동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1월 6일 - 최윤동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9월 29일 - 최윤동 가출옥으로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 최윤동 신간회 대구지회 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5월 10일 - 최윤동 제헌국회의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최윤동 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부당수 역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 최윤동 건국포장 수훈
몰년 시기/일시 1965년 5월 11일연표보기 - 최윤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최윤동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남성로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서울 - 서울특별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서로군정서 군무국장|신간회 대구지회 회장|제헌국회의원

[정의]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최윤동(崔允東)은 1897년 7월 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서 최명조(崔明祚)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중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최윤동은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를 졸업하였고, 1914년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였다. 191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8년 가을 윈난[雲南]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활동할 방안을 찾기 위하여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9월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군무국장을 맡았다. 1919년 10월 중국 펑톈성[奉天省]을 떠나 기차로 서울에 들어와 광화문 모처에서 이수영(李遂榮) 등과 만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방안을 논의하였다. 최윤동은 이 일로 종로경찰서에 1개월간 유치되었다. 이후 12월에 대구 자택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 방안을 찾았다.

최윤동은 대구에 머무는 동안 1920년 1월 창립된 대구청년회에 가입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발기위원이 되어 1920년 6월에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의 조사부 일을 맡았다. 1921년 5월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던 배천택(裵天澤)으로부터 군사통일회의 참석 권유를 받고 6월 무렵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최윤동은 1922년 9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하여 다시 국내로 돌아왔고, 1923년 4월 서울 인사동 이수영의 집에서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위하여 논의하던 중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에 사는 홍정수(洪禎修)가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윤동은 10월 말 권총을 휴대하고 대구에 온 이수영과 함께 같은 해 11월 2일 홍정수의 집으로 이동하던 중 칠곡군 동명면 송림사(松林寺)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윤동은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이른바 ‘경북중대사건’으로 알려졌다. 최윤동은 1926년 9월 29일 대구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출소하였고, 1923년 6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대구지방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9월 신간회 대구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2월에는 지회장을 맡았다. 1928년에는 대구청년동맹 주최의 대구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하여 신간회 대구지회 활동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중외일보사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를 맡았다. 1937년 경북상공주식회사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1942년에 감사역을 맡았다.

최윤동은 광복 후 서울에서 한국국민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1945년 9월 국민대회준비회 참여를 거쳐 한국민주당 조직부장, 중앙집행위원회 연락부장, 국방문제대책 책임위원, 경기 지역 지방유세 담당 등의 일을 맡았다. 11월에는 미군정청 특사로 대구를 방문하여 미군정 경상북도 고문 및 대구 고문 등을 추천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6년 1월 비상국민회의에 경상북도 대표로 참여하였고,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대구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최윤동은 제헌국회에서 외무국방위원회 위원장 및 국방분과 주사, 국회법 및 국회 규칙 기초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군조직법」을 정비하는 등 국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최윤동한국전쟁 중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772부대]를 조직하여 동해안 ‘장사동상륙작전(長沙洞上陸作戰)’에 참여하였다. 최윤동은 전쟁 후 1957년 김준연과 통일당을 창당하여 부당수를 역임하였고, 5·16군사쿠데타 이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최윤동은 1965년 5월 11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윤동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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