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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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川李氏 |
영어공식명칭 | Incheon Leessi|Lee Clan of Incheon |
이칭/별칭 | 경원이씨(慶源李氏),인주이씨(仁州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세욱 |
본관 | 인천 - 인천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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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세거|집성지 | 서변동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
성씨 시조 | 이허겸 |
입향 시조 | 이말흥 |
[정의]
이허기를 시조로 하고 이말흥을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의 세거 성씨.
[연원]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시조는 이허기(李許奇)이다. 이허기는 본래 김해허씨(金海許氏)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4년(755년) 사신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었는데, 756년 안록산의 난 때 촉으로 피난하는 당 현종(玄宗)을 호종(扈從)하였다. 757년 난이 평정되어 도성으로 돌아온 현종이 허기에게 상으로 서책과 함께 황제의 성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여 ‘이허기’가 되었다. 이허기가 신라로 환국하자 신라 경덕왕은 소성백(邵城伯)의 작위와 식읍 1,500호를 내려 세습케 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인천을 본관으로 삼고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입향 경위]
인천이씨 대구 입향조는 연산군(燕山君)[1494~1506년 재위] 때 창녕현감(昌寧縣監)을 지내고 지금의 수성구 파동에 정착한 이말흥(李末興)이다. 이후 후손인 이주(李輈)[1566~1604]가 1570년 팔공산 자락 무태(無怠)[현 북구 동변동·서변동 일대]로 이거하여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대를 이어 세거하게 되었다.
[현황]
인천이씨는 시중공파(侍中公派)·공도공파(恭度公派)·쌍명재파(雙明齋派)·충강공파(忠剛公派)·태암공파(苔巖公派) 등 5개 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 가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인천이씨는 8만 3855명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대구 지역 인천이씨 관련 유적으로는 북구 서변동에 이문화(李文和)를 배향하는 서계서원(西溪書院)이 있다. 이 밖에 수성구 중동 행정복지센터에 이득심(李得心) 송덕비, 두류공원에 이장희(李章熙)[1900~1929] 문학비, 망우공원에 이경희(李慶熙)[1880~1949] 공덕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