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989 |
---|---|
한자 | 永思齋[壽城區] |
영어공식명칭 | Yeongsaja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35길 61[황금동 47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일주 |
건립 시기/일시 | 1928년 - 영사재[수성구] 건립 |
---|---|
현 소재지 | 영사재[수성구]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35길[황금동 474-1] |
성격 | 재실 |
양식 | 골기와 팔작지붕 목조 와가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3칸 |
소유자 | 성산배씨 문중 |
관리자 | 성산배씨 문중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배석봉·배영을 추모하는 재실.
[개설]
영사재(永思齋)는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배석봉(裵錫鳳)과 배영(裵泳)[1810~1852]을 기리기 위하여 성산배씨 문중에서 건립한 추모 재실이다.
배석봉의 호는 모재(慕齋)이고,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고 한다.
배영의 자는 함중(酒中), 호는 공천(孔川)이다. 15세 때부터 외와(畏窩) 최림(崔琳)에게서 소학을 7년간 배워 진수를 깨달았으며, 만년에는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등과 교유하였다. 배영은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기설(理氣說)·성정설(誠正說)·시중설(時中說) 등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부친상, 조모상, 모친상을 연이어 당해 9년간을 상중에 있으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예를 갖추어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배영은 천연두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은 집안을 위하여 자신의 가재도구를 팔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배영의 이러한 효행과 선행이 조정에 알려져 호세(戶稅)가 감면되고 정려를 받았다.
[위치]
영사재는 수성구 황금동 474-1에 있다.
[변천]
영사재는 1928년에 건립되었다.
[형태]
영사재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을 얹은 목조 기와집이다. 중앙의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양편에 각각 방 1칸이 배치되어 있다. 서편으로 툇마루가 있고 마루와 뜨락 사이에는 벽돌로 쌓아 올려 마루 밑이 보이지 않도록 되어 있다. 정원에는 배롱나무, 측백나무, 사철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정문인 솟을대문 외에 서편에는 작은 쪽문이 있다.
[현황]
영사재는 성산배씨 문중에서 잘 관리하여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성산배씨 문중은 현 경북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선산을 성주군 용암면 사곡동으로 이장하였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이전 일요일을 택하여 영사재에서 묘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