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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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信女學校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 지역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변천]
명신여학교는 1910년 무렵 대구의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와 신명여학교(新明女學校)가 합병하여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이다. 명신여학교는 1926년 4월 교명을 사립 복명여자보통학교로 변경하였다.
[교육 활동]
명신여학교는 1910년 4월 또는 8월에 대구에서 근대 여성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다. 명신여학교의 설립 자금은 1909년 1월에 대구를 방문한 대한제국 황제의 은사금으로 충당되었다. 명신여학교의 교사는 달성친목회의 공간을 활용하였다. 설립 뒤 명신여학교의 재정은 대구의 유지들이 낸 기부금과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해산 후 남은 돈의 이자로 마련되었다.
명신여학교의 1921년 무렵 학교 대표는 정해붕(鄭海鵬)과 이종면(李宗勉)이었다. 정해붕과 이종면은 대구의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이다. 이종면의 경우 협성학교 설립과 운영에도 깊이 관여한 경험이 있었다. 명신여학교의 교사는 최충도(崔仲度), 권태희(權泰禧), 이종형(李鍾瑩), 박동생(朴東生) 등이 맡고 있었다.
명신여학교는 1921년 이전부터 기부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재정난에 봉착하여 운영 위기를 맞았다. 1921년 3월 23일에 열린 명신여학교의 제6회 졸업식은 교장과 학부형 없이 진행되었다. 명신여학교는 1921년 4월에 교사들의 노력으로 학부형대회를 열어 학교 정상화를 위한 학부형협의회를 구성하고, 재정 운영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교장에 김도균(金燾均), 교감에 배두용(裵斗容)을 선임하였다.
명신여학교는 대구의 유일한 여학교이었기에 지역사회의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1921년 6월에 대구의 유지들로 구성된 명신여학교 후원회의 도움을 받았다. 명신여학교 후원회는 회장 박기돈(朴基敦), 간사장 정운기(鄭雲騏) 등으로 구성되었다. 명신여학교는 1922년 2월에 학교 운영비 3,000원을 내기로 한 박기돈을 새로운 설립자로 일제 교육 당국으로부터 설립자 인가를 받아 정상화를 꾀하였으나 설립자의 교비 횡령 등 재정문제가 발생하여 다시 위기에 빠졌다. 명신여학교는 1924년 2월 대구의 서희원을 새로운 설립자로 맞았다가 1925년 12월에 김울산을 교주로 하는 설립자 변경 인가를 받고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