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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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靑年同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1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24년 12월 16일 - 대구제4청년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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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25년 7월 7월 - 대구제4청년회에서 대구청년동맹으로 개칭 |
설립 시기/일시 | 1927년 7월 24일 - 대구청년동맹 창립 |
해체 시기/일시 | 1928년 12월 - 대구청년동맹 해체 |
최초 설립지 | 대구청년동맹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대구노동공제회관] |
성격 | 청년운동 단체 |
설립자 | 대구청년회|대구무산청년회|대구청년동맹|대구청년동맹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창립한 청년 단체.
[개설]
조선청년총동맹의 군 단일제 청년운동 방침이 제시되자 가장 대립 관계를 보였던 대구청년회와 대구청년동맹[대구제4청년회의 후신]이 합동을 결의한 뒤 대구청년회, 대구청년동맹, 대구무산청년회, 아구청년동맹 등 4개 청년 단체가 1927년 6월 24일 ‘각 단체 연합 간부 회의’를 열었다. ‘각 단체 연합 간부 회의’에서 파쟁적 분리를 포기하고 단일한 청년 동맹을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합동전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합동 청년 조직의 선언 및 강령 작성 위원으로 박광세(朴光世), 조병렬(趙炳烈), 장적우(張赤宇) 등 세 사람을 선정하였다. 대구청년동맹은 1927년 7월 24일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합동 대회를 통하여 창립되었다. 먼저 기존의 청년 단체를 해체한 뒤 열린 합동 대회는 결의 사항을 채택하고, 집행위원을 선정한 뒤 ‘청년 동맹 만세 삼창’으로 마무리되었다.
[설립 목적]
대구청년동맹의 창립은 ‘분립에서 통일로! 부분적 운동에서 전선 운동으로! 경제 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라는 조선 사회운동의 구호를 반영하여, 민족 내 계급이 제휴하여 청년운동을 전선적으로 전개할 것과 신간회 대구지회의 적극 지지 등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변천]
1927년 7월 24일 창립한 대구청년동맹은 1928년 12월테제의 발표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과 혁명적 대중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해체되고,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과 혁명적 대중운동 내의 청년 조직으로 변화되어 갔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청년동맹의 주요 사업과 활동은 창립대회 때 채택된 18개의 결의 사항에 제시되었다. 청년운동의 전민족적 및 전조선적 전개, 신간회 지지, 경북청년연맹 조직 등이었다. 대구청년동맹의 지지를 받아 1927년 9월 3일 신간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었다. 경북청년연맹은 1928년 1월 경상북도 김천에서 개최된 경북기자대회를 통하여 전격적으로 조직되었다. 대구청년동맹 및 신간회 대구지회의 주요 인물인 박광세(朴光世), 김선기(金善基), 장적우(張赤宇) 등은 1927년 12월 대구의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강좌회를 본격적인 학생 비밀결사 조직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신우동맹(新友同盟)을 결성하였다. 신우동맹은 다시 혁우동맹(革友同盟), 적우동맹(赤友同盟), 일우동맹(一友同盟), 우리동맹 등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1928년 대구고보폭압동맹반대투쟁을 펼쳤다.
[의의와 평가]
대구청년동맹은 대구청년회, 대구청년동맹, 대구무산청년회, 아구청년동맹 등 4개 청년단체가 합동전권위원회를 통하여 대구 지역 단일 청년 조직으로 출범한 것으로 파벌적 대립 관계를 정리하고 전민족적·전조선적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