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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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十字道路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09년 경상북도관찰사 박중양이 주도하여 만든 대구 최초의 십자도로.
[역사적 배경]
을사조약을 계기로 1906년 대구에 이사청이 설치된 이후 대구읍성이 헐리고 대구읍성이 헐린 자리에 순환도로가 조성되었다. 이어 경상감영 객사가 철거되었다. 그 뒤 경상북도 관찰부의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은 시가지 간선도로 개설 사업을 벌이면서 경상감영을 관통하는 십자도로 건설에 나섰다.
[경과]
대구 십자도로는 1909년 시가지 간선도로 개설 사업으로 조성되었다. 1908년 대구읍성을 허물고 만든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동성로 등 도로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십자도로는 대구부청 앞에서 도청이 있는 포정동을 거쳐 서문로로 이어지는 동서선과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선으로 구성되었다.
[결과]
대구 십자도로가 대구읍성 내 경상감영 내부를 동서남북으로 관통함에 따라 경상북도 관찰부 자리는 네 부분으로 갈라졌다. 경상감영의 맞은편에는 경북재판소, 서편에는 대구농공은행과 제일은행이 들어서고, 대구농공은행의 서쪽 건너편에는 대구경찰서가 들어섰다. 그 주변에는 제국재향군인회 대구지부, 적십자사 대구지부 등 일본의 관변단체가 자리 잡았다.
대구 십자도로의 건설을 추진한 박중양은 대구의 일본인 민회로부터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금줄이 달린 금시계를 선물 받았다. 대구의 일본인들은 박중양을 ‘대구의 은인’으로 치켜세웠다.
[의의와 평가]
대구 십자도로의 개통은 일제의 대구 침탈에 따른 경북 관찰부[경상감영]의 변동과 훼손이 마무리되었음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조선조 경상감영의 설치 이래 경상도의 상징이었던 경북 관찰부[경상감영]의 위엄은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