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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62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1876년 개항에서 1945년 광복까지 대구 지역의 역사.

[개설]

대구는 개항 이후 전통적 조선 사회에서 시민사회에 기초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여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대구 사회는 개항 이후 서구 근대가 파급되는 과정에서 전통사회의 질서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이냐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대구는 개항 이후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개항은 서구 근대 자본주의제 상품의 국내 침투와 국내 농산물의 일본 수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1885년부터 일본 상인의 내륙 행상이 허용되면서 낙동강 연안을 배경으로 한 일본 상인의 곡물 매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낙동강 연안의 상업적 농업의 확대가 일어났다. 상업적 농업의 상품은 주로 쌀과 콩, 면포·면화 등이었다.

[근대 개혁과 서구 근대의 변용]

대구는 1895년 갑오개혁 때 지방 제도의 개편에 따라 행정구역의 변화를 겪게 된다. 1896년 6월 25일 개혁에서 전국의 행정구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도를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누고 도에는 관찰사를 두었다. 대구는 경상북도의 수부가 되면서도 대구군으로 편성되었다. 1896년 7월 민중을 계몽하고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독립협회가 창립되자 대구에서도 독립협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어 근대 개혁이 추진되었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수립이 공포되어 ‘구본신참’의 논리 아래 황실 중심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개항 이후 대구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서구 근대를 전파하였다. 1815년 경북 첫 박해, 1827년 전라도 옹기굴(甕器窟) 대검거, 1839년 기해박해 때 교인들이 관덕정[관덕당]에서 순교하였다. 그사이 1837년에 서울에서 온 김씨 가문이 대구 읍성에 거주하였다. 1886년에 천주교 대구 본당이 신설되고, 초대 본당 주임으로 프랑스인 바오로 김신부가 임명되었다. 또 개신교도 1888년 8월 미북감리회 헨리 G.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와 조지 H. 존스(George H. Jones) 선교사가 대구를 찾은 이래 1893년 4월 윌리엄 M. 베어드(William M. Baird)가 선교 목적으로 대구에 온 첫 선교사였다. 대구에 선교사를 통한 서구 문명이 수용되는 순간이었다.

대구에 1893년 9월 무렵 히자쓰키[膝付]와 무로[室] 등 일본인이 들어온 이래 1894년 8월 청일전쟁 때 대구에 남부병참선이 설치되었다. 그 뒤 러일전쟁과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를 계기로 개항장 부산에서 대구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일본의 대구 침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근대 계몽운동과 일제의 대구 침탈]

대구는 1905년 이후 국권 수호와 식민지화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1906년에 대구에는 계몽운동 단체인 대구 광문사대구광학회가 설립되어 흥학설교와 식산흥업을 논리로 하는 근대 개혁운동이 추진되면서 근대 학교와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초에는 일본의 침탈에 맞선 국채보상운동이 발흥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대구진위대 소속 군인들이 산남의진과 같은 의병 진영에 합류하면서 의병전쟁을 고양하였다. 1908년에 대한협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어 흥학설교, 식산흥업을 바탕으로 하는 실력양성론에 기반한 계몽운동이 다시금 일어나 근대 학교가 설립되고 회사가 설립되었 뿐 아니라 개진협회, 달성친목회, 교육부인회, 우현서루, 시무학당 등 다양한 계몽운동 단체와 기관이 생겨났다. 이로써 대구에는 1910년대 독립운동의 배경이 형성되었다.

대구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1906년에 대구읍성이 파괴되었다. 이사청이 설치되면서 일본의 대구 침투가 급속히 이루어졌고, 전통적 대구의 풍광이 사라지면서 식민도시로 재편되어 갔다. 일제는 1906년에 화폐정리사업을 하고, 1907년에는 정미칠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1909년에 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 장악을 거쳐 강제병합을 결정하였고, 1910년 8월 병합늑약을 체결하면서 병합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대구는 일제의 식민도시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대구]

1910년 8월 일제의 강제적 한국 병합이 이루어진 이후 일제는 조선의 일본화를 근간으로 한 식민 통치를 펼치며 대구를 내륙 거점으로 삼아 식민 지배, 경제적·인적 수탈을 일삼았다. 이에 맞선 대구 사람들은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민족독립운동을 벌여 일제의 패망과 근대 국민국가 수립에 이바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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