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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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
집필자 | 박유미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61년 8월 - 「꽝철이」 유증선이 전병만에게서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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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71년 - 「꽝철이」 유증선이 발간한 『영남의 전설』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1년 - 「꽝철이」 『내 고장 전통문화』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1년 - 「꽝철이」 『청도 군지』에 수록 |
관련 지명 | 대비사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794 |
관련 지명 | 대비사골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
채록지 | 안인동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면 안인동 |
성격 | 설화|전설|용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주지|상좌|꽝철이 |
모티프 유형 | 등천(登天)의 실패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전해 내려오는 꽝철이에 대한 이야기.
[개설]
「꽝철이」는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대비사(大悲寺)에 전해지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꽝철이에 대한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유증선이 전병만[65세, 남,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면 안인동]에게 채록하여 1971년 발간한 『영남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또한 청도군에서 1981년에 발간한 『내 고장 전통문화』와 1991년에 발간한 『청도 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꽝철이’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 강처리, 깡처리, 깡철이라고도 부른다.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자리한 대비사에도 꽝철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호거산 북편 대비사골에 위치한 대비사에는 상좌(上佐)가 한 사람 살았다. 어느 해 가뭄으로 온 마을 주민들이 고충을 겪고 있을 때 대비사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상좌가 가꾸는 채소밭만은 가뭄이 들지 않았다. 주지는 상좌의 밭에 있는 채소들만 시들지 않은 것이 이상하여 상좌를 의심하였다. 그런데다 매일 밤 상좌 중에 슬며시 절을 나가는 것도 이상하였다.
상좌가 밤마다 향하는 곳은 운문사 계곡 깊은 곳이었다. 상좌는 용이 되어 승천할 날만을 기다리며 계곡 안쪽에 큰 못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상좌가 절을 빠져나가자 주지가 몰래 뒤를 밟았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상좌가 막 용으로 변하고 있었다. 주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 순간 승천하려던 용은 사람의 인기척에 그만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꽝철이가 되고 말았다.
꽝철이가 된 상좌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일이 무산이 되자 원통하고 화가 치밀어 꼬리로 바위들을 세게 내리쳐서 깨버렸다. 이것이 대비사 뒤쪽 호거산 봉우리 사이에 깨져 있는 듯한 형상의 ‘깨진 바위’이다. 심통을 실컷 부리고 난 뒤 꽝철이는 운문산 능선을 넘어 경상북도 밀양시 산내면으로 달아났다. 이때 꽝철이가 새로 터를 잡은 곳이 ‘시례 호박소[실이 호박소]’라고 전한다.
이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시례 호박소에서 꽝철이를 쫓기 위한 기우제를 올렸다. 꽝철이가 대대로 불을 일으켜서 가뭄을 관장하는 도깨비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가 난 꽝철이가 불을 내뿜고 다녀 가뭄이 든다고 믿었다. 그래서 ‘꽝철이의 가을’이라고 하면 ‘흉년’을 뜻하였고, ‘꽝철이가 가는데 가을도 봄 같다.’라고 하면 그해 농사가 모내기 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 흉년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상좌가 승천하기 위해 만든 못 근처에 있는 마을은 ‘못골’이라 하였다. 지금의 대비사골에서 호거산 능선을 너머에 위치한 마을이다.
[모티프 분석]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대비사와 관련해 전해 오는 「꽝철이」는 ‘등천의 불발’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용이 되지 못하고 ‘시례 호박소[실이 호박소]’에 살게 된 이무기의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대비사 근처에 똑바로 선 바위가 없다는 것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진실성을 부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