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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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면정(綿鼎),소캐 솥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서 만들었던 솥.
[개설]
운문면 신원리의 마을 남쪽 계곡에서 대비사가 있는 금천면 박곡으로 가는 고개를 장군 바위 밑에 있다고 해서 미태재라고도 부르고 명태재라고도 하는데, 면현(綿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면(綿)[솜]의 우리 말 방언은 소캐이다.
운문사에는 고려 때 가장 많은 식구가 살았다. 이들은 많은 경작지를 이용하여 솜을 많이 생산하였고 따라서 경제 작물로 유명하였다. 밀양이나 청도 쪽으로 넘나들면서 소캐를 많이 생산하는 마을이라 해서 소캐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솥을 소캐 솥으로 불렀다. 지명을 따라 솥의 이름이 정해진 것이라 한다. 속계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의 이름은 소캐인 것이다.
[연원 및 변천]
솥을 만들기 시작한 연대는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옛날 이곳에 신라 때부터 쇠를 다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청도 군지(淸道郡誌)』에는 신라 시기부터 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 시대에 솥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운문산 계곡 곳곳에 철을 다루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곳에는 쇠를 다루는 기술이 축적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고려 때 운문사에 내려진 노비들의 생활 터전이 자연스럽게 운문사 주위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양 국사가 고려 태조에게서 받은 사액과 따라온 노비가 500명이었고 원응 국사가 받은 사패지가 300결에, 노비가 300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장인(匠人)들로서 여러 가지 기술 축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많은 경작지를 이용하여 생산한 것이 처음엔 면(綿)이었고 다음에 경제적으로 발달된 것이 많이 생산되는 쇠와 나무를 이용한 솥일 것이라는 것이다.
190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가 질 좋은 속계솥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값싸고 가벼워서 운반하기 쉬운 일본인들이 만든 개량 솥이 들어오면서 상대적으로 무겁고 비싼 속계솥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형태]
속계솥 은 가마솥의 대명사이다시피 할 정도로 유명한 솥이었다.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무쇠로 만든 솥이지만, 오랜 세월을 사용해서 밑이 닳아 뚫어져도 녹이 슬거나 바닥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제품의 품질이 우수하다고 높이 평가되어서이다. 솥 밑바닥이 뚫어지는 이유는 닳아서 뚫어졌다기보다는 누룽지를 만들기 위해서 솥을 달구어 물을 부어서였다는 어른들의 말씀이다. 또 죽을 쑤기 위해서 솥을 달구었다가 갑자기 찬물을 부으면 솥의 밑이 잘 빠진다고 한다.
속계솥 의 모양은 옹달져서 이름을 옹달솥이라고도 하였다. 속계솥은 크기가 3가지로, 큰 것과 중간 것 그리고 작은 것이 있었다. 작은 옹달솥의 특징은 솥전이 작고 앙증맞은 모양이었다고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솥은 우리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생활 필수품이다. 청도 운문의 솥은 품질의 우수성으로 유명세를 탔고, 따라서 대량 생산의 필요성으로 인해 운문면 오진리·방음리에 솥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다. 1920년경 일본인들이 석탄을 사용하여 얇고 가벼운 개량 솥을 대량 생산하자 무겁고 두꺼운 우리나라의 재래 솥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운문사 주위에는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 겹겹이 쌓여 있어 나무가 많이 생산되었고 또한 주변 광산에서 일찍부터 철을 생산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쇠의 공급이 쉬웠다. 오진리[오릿골] 주변에는 가마에 필요한 질 좋은 흙이 나왔으므로 3가지가 모두 갖춰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