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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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陰地里碑石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음지리 4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채광수 |
건립 시기/일시 | 1862년 - 최한성 송덕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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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33년 -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건립 |
현 소재지 | 음지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음지리 42 |
성격 | 효자비|기념비 |
양식 | 비좌개석[최한성 송덕비][추득래 효자비]|비좌개석[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
관련 인물 | 최한성|추득래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145㎝[최한성 송덕비]|150㎝[추득래 효자비]|175㎝[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
너비 | 45㎝[최한성 송덕비]|45㎝[추득래 효자비]|45㎝[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
두께) | 15㎝[최한성 송덕비]|19㎝[추득래 효자비]|20㎝[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음지리에 있는 비석 떼.
[개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음지리에 효자 최한성(崔翰成)과 추득래(秋得来)의 송덕비 2기와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1기가 서 있다.
최한성은 본관이 흥해이며, 직제학 연(淵)의 후손이다.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이 정도를 넘었다. 매일 3번씩 성묘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사는 것을 보며 자주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다. 추득래는 부친상(父親喪)에 여묘하던 중에 호랑이가 와서 보호해 주었고, 모친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 생명을 연장시킨 효자이다. 이들의 효성을 기릴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또한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는 청도읍 음지리는 화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있는 마을로 밤티재를 넘어야 해 주민들의 왕래가 불편했는데, 도로 공사로 교통이 편리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건립 경위]
최한성과 추득래의 비문에 따르면 그들의 효행과 행덕(行德)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최한성 송덕비의 경우는 1862년(철종 13)에 건립된 것이 확인된다.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는 일제 강점기 치도 사업의 일환으로 화악산 자락 밤티재 구간의 도로 확장 공사 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33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위치]
밀양에서 유천을 지나 한재로 가는 길 즉 청도읍 음지리 큰 마을 초입의 도로변에 비석 3기가 있다. 원래 마을 부근 다른 곳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모아 놓은 것이다.
[형태]
최한성 송덕비 양식은 농대석(籠臺石) 위에 비신을 세우고 태극 문양으로 이수를 장식한 형태이다. 전면에는 비명(碑銘)과 찬시(讚詩)를 후면에는 간지(干支) 각석해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175㎝, 너비 45㎝, 두께 15㎝이다.
추득래 효자비 양식은 비신에 팔작 지붕형을 갖춘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새겨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150㎝, 너비 45㎝, 두께 19㎝이다.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양식은 농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형을 갖춘 비좌개석 형태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우측면에는 간지를 각석해 놓았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전체 높이 175㎝, 너비 45㎝, 두께 20㎝이다.
[금석문]
1. 최한성 송덕비
(전면)
전 참봉 최한성 송덕비(前參奉崔翰成頌德碑)// 호행기덕(好行其德)/ 수급아사(遂及我私)/ 후곤계지(後昆繼志)/ 영세유사(永世遺辭)[덕을 행하기를 좋아하여 마침내 우리까지 미치었네./ 후인들은 그 뜻을 계승하여 길이 후세까지 말이 있으리라.]
(후면)
임술이월일(壬戌二月日)/ 대현동인입(大峴洞人立)
2. 추득래 송덕비
(전면)
고 처사 추 공 효자 휘 득래지비(故處士秋公孝子諱得来之碑)// 천서인이(天叙人彛)/ 유효위대(有孝爲大)/ 유공지효(維公之孝)/ 탁언희세(卓焉稀世)/ 부몰여묘(父沒廬墓)/ 매야호위(每夜虎衛)/ 모병단지(母病斷指)/ 소연이세(蘇延二勢)/ 이물부감(異物孚感)/ 역비일재(亦非一再)[하늘의 질서 사람의 윤리에서 효도가 가장 크다고 하리라./ 오직 공의 효성은 우뚝하여 세상에 드문 경우였다네./ 부친이 돌아가시어 여묘를 하자 밤마다 호랑이가 와서 호위를 하였네./ 모친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물리니 깨어나시어 두 해나 더 연명하셨네./ 이물들이 감응한 경우도 또한 한 두 번이 아니었네.]
3.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
(전면)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大峴 道路 竣工 記念碑)// 화지남악(華之南岳)/ 유현유심(有峴幽深)/ 척개험위(斥開險危)/ 식호등림(式好登臨)/ 일로요역(一路徭役)/ 관민합심(官民合心)/ 삼백여호(三百餘戶)/편석천금(片石千金)[화산의 남쪽 산악에 그윽하고 깊은 고개가 있다네./ 험난한 것을 트이도록 여니 산을 오르기 정말 좋게 되었네./ 한 길은 내는 노역에 관민이 합심 협력하였네./ 삼백여 호 되는 주민이 천금 같은 작은 비석을 세우네.]
(우측면)
소화팔년계유사월일(昭和八年癸酉四月日)[1933년 4월]
[현황]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비석들로 별도의 보호 시설이나 안내판은 없이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의의와 평가]
최한성과 추득래의 효자비는 성리학적 사회를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 문화사 이해에 도움을 주는 사적이라 할 수 있다. 대현 도로 준공 기념비는 일제 강점기 도로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