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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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道斥和碑 |
이칭/별칭 | 척화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도주관로 14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표 |
건립 시기/일시 | 1871년 4월 - 청도척화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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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5년 8월 5일 - 청도척화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9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청도척화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청도척화비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
성격 | 척화비 |
관련 인물 | 흥선 대원군|이하응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122㎝[높이]|44㎝[너비]|15㎝[두께]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청도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에 있는 개항기의 척화비.
[개설]
청도척화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를 겪은 후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서구 열강의 침입을 경고하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1866년에 비문을 짓고, 1871년 전국 각지에 세웠던 여러 개 척화비 중의 하나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 흥선 대원군이 몰려나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경상북도 내에는 경부·구미·청도 등지에 일부가 남아 있다. 청도척화비는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청도척화비는 조선 말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은 후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서구열강의 침입을 경고하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1866년 비문을 짓고, 1871년 전국 각지에 세웠던 여러 개 척화비 중의 하나이다.
[위치]
청도척화비는 화양읍 서상리 도주관 앞에 있다. 화양읍사무소에서 도주관로, 동헌길을 따라가면 도주관에 이른다. 척화비는 도주관 입구 안내판 옆에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단을 둥글게 다듬은 호패 모양으로 비 받침을 갖추고 있으며, 비의 크기는 높이 122㎝, 너비 44㎝, 두께 15㎝이다. 비 몸체의 앞면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을 큰 글씨로 새겼고, 왼쪽에 ‘계오만년자손 병인작신미입(戒吾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을 작은 글씨로 새겼다.
[금석문]
청도척화비 비문의 뜻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뜻이다.
[현황]
도로변에 있던 것을 청도군 객사인 도주관(道州館)에 옮겨 세우면서 주변을 정비하였으며, 철제 기둥을 세우고 사슬을 둘러쳐서 보호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식민지 쟁탈을 위하여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 이를 경계하여 국가의 독립을 추구하려는 자주 의식을 보여주는 한편, 쇄국 정책이 강화되어 세계사의 흐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근대 사회의 형성이 지연되는 모습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